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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라는 이름의 해방구를 열다.
2001-07-19

열정의 땅,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도 판타스틱영화제가 있다. 각각 1968년과 1981년 생겨 부천영화제의 형님 뻘이 되는 시체스 영화제와 판타스포르토 영화제가 그것. 16일 두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자리를 같이했다. 시체스영화제의 앙헬 살라는 변호사로 일하다 “법이 지루해서”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으며 판타스포르토의 마리오 도민스키는 평론가로 활동하다 영화제를 시작한 전형적인 영화광. 영화제 책임자가 되기까지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두 영화제가 나눈 우정은 특별하다. 과거 스페인에서 영화제는 독재정권의 폭압 아래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70년대 시체스 영화제에서 판타스포르토의 가능성을 본 마리오 도민스키는 영화제 탄생비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스페인에서 프랑코의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언론, 출판, 예술 등 모든 자유가 박탈당했다. 포르투갈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검열은 영화에서도 강력하게 작용했다. 영화제는 검열을 피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 너무 많은 영화를 한꺼번에 틀기 때문에 당국도 검열할 시간이 없었다.”

압제의 해방구였던 시체스는 프랑스 아보리아즈 영화제가 성공한데 자극받아 생긴 판타스틱영화제로 초기엔 영화의 질에 대한 관심보다 당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튼다는 데서 충분한 의의를 찾았다. 마리오 바바, 다리오 아르젠토, 장 롤랑 등 ‘피와 벗은 여체’로 포스터를 장식한 영화들이 시체스를 찾았다. 당시 그들은 작가로 대접받지 못했지만 시체스는 이런 감독들을 홀대하지 않았다. 판타스포르토가 생긴 80년대 상황은 조금 달랐다. 영화청년 시절 판타지영화에 별 관심이 없던 마리오 도민스키는 시체스에서 색다른 영화를 본 뒤 포르투갈에 비슷한 영화제를 만들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시체스보다 발빠르게 움직일수 있던 판타스포르토는 시체스가 더디게 발전시킨 것을 쉽게 받아들여 후발주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판타스포르토는 그리너웨이, 알모도바르, 코엔형제, 타란티노, 워쇼스키 형제 등의 데뷔작을 소개, 새로운 감독을 발굴하는 영화제로 자리를 잡았다.

아보리아즈가 시체스의 모델이 되고 시체스가 판타스포르토의 모델이 된데서 알 수 있듯 사실 유럽의 판타스틱영화제는 처음부터 적극적인 교류를 해왔다. 2000년 부천영화제도 준회원으로 가입한 유럽판타스틱영화제연합은 각국의 좋은 프로그램을 교환해왔다. 특히 헬싱키영화제로 시작된 한국영화특별전은 브뤼셀을 거쳐 판타스포르토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두 사람은 최근 아시아영화, 그 중에도 한국영화가 관심사라고 입을 모은다. 시체스에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는 새로운 경쟁부문을 만들었다는 앙헬 살라는 “올해 한국영화 9편을 초청할 예정이다. 일본영화나 홍콩영화는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반면 한국영화는 새롭고 흥미롭다. 2년전 <조용한 가족>은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지난해에는 한국영화를 틀지 못했는데 올해는 좋은 작품이 많다”라고 말한다. 마리오 도민스키는 아예 한국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일까지 한다. 영화제 운영을 위해 판타스포르토 이름으로 수입, 배급에도 손을 대고 있는 그는 <섬> <해피엔드> <반칙왕> 등을 수입했다. 두 사람이 유럽의 끝에서 아시아의 끝까지 찾아온 이유도 최근 한국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컸을 것이다.

남동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