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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 24억원과 6천만원의 함수
최보은 2005-06-24

황우석 교수

대한항공과 관련한 두 가지 최신 늬우스.

첫째, 황우석 교수에게 국내 국제 전 노선 최상위 클래스 10년 자유이용권을 선물했다.

둘째, 회장의 외아들이 연루된 폭행사건에서 피해자가 요구한 6천만원의 지불을 거절하고 있다.

(워낙 할 일이 없어서 계산해봤다. 특등석(프리미엄) 내지 1등석 왕복요금이 지역에 따라 400만원대에서 800만원대이니까 평균 잡아 600만원. 올해 황 교수의 해외출장 횟수가 40회쯤 된다니, 곱하기 40 하면 연간 2억4천만원이다. 10년이면 24억원.)

한번 등을 기대기만 하면 자본주의 원리, 찰나에 파악하게 되고, 돈 앞에 충성을 다시 한번 맹세하게 되는 1등석, 돈과 신분에 따른 차별대우란 무엇인지 본때있게 보여주는 그 자리에 나도 한번 티케팅 실수로 앉아본 적 있다. LA에서 서울로 날아오는 편도 10시간 비행 동안, 멋진 상류사회 남친을 건지는 따위의 영화 같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자리 자주 앉았다간 인간성 변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결론은 확실히 내렸다.

물론, 황 교수는 그런 특별대우 받을 자격이 있다. 달력의 요일을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바꾸고, 하늘을 감동시키려 드는 일, 아무나 못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쇠젓가락으로 콩 집는 기술을 인류건강의 획기적 돌파구를 여는 데 쓰는 사람과 그저 콩 집는 데만 쓰는 사람. 그 결과, 하늘이 감동하여 하늘의 특등석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취지야 보나마나, 국보급 과학자를 여행길에 안락하게 모심으로써 과학연구사업을 스리쿠션으로 돕고, 차제에 기업이미지 홍보도 겸해보자는 거겠고. 황 교수도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예전처럼 이코노미 타고다니기 좀 피곤할 거고. 게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히딩크 감독에게 전 노선 4년 이용권, 배용준에게는 한-일노선 3년 이용권을 준 적 있다지 않나.

하지만, 내가 황 교수라면 요즘 같은 상황이 이코노미 좌석보다 더 불편할 것 같다. 출신지역 자치단체에서 생가복원 내지 주변 명소조성까지 들먹이는 상황이니 대한항공이 그 정도 파격적인 호들갑을 떠는 게 무슨 대수랴 싶기도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최선의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건 이번 일만 봐도 안다. 예컨대 이런 반응을 보잔 말이지.

“대학교수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1등석에 앉아야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다른 교수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할 것 아닌가. 이러다간 황우석 자신이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황우석 교수를 돕는 일은 바람직하나, 이 냄비의 물이 10년은 끓지 못할 것 같다.”(김동길 교수)

다른 사람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이거 참 중요한 말이다. 우리, 외워놓자. 한 사람에게 오마주 바치느라 여럿 마음 다치게 하는 사고, 우리만이라도 치지 말자.

두 번째는 난폭운전으로 이미 사고를 친 바 있던 회장의 외아들이, 또 한번 난폭운전하다가 폭행사건으로 이어졌다는, 어찌보면 재벌가의 사소한 뒷얘기다. 아무리 재벌이라고 사소한 폭행사건 위자료로 6천만원을 요구하다니, 하고 피해자를 꼬나볼 수도 있겠고. 좋은 일에 24억원은 흔쾌히 써도, 안 써도 되는 일에 6천만원은 못 쓴다는 얘길 텐데.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내 삶하고는 상관없는 일… 인가?

피해자는 ‘피해자에 대한 예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직접 얼굴 내밀고 사과 한번만 했더라면, 이라는 주장. 경위야 어찌됐든 사고를 치고 나서, 사과하지 않고 회사 직원들에게 뒤처리 떠맡기고 자기는 미국으로 떠버리는 거, 재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만약 피해자가 자신과 동급의 재벌이었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대했을까 생각해보면 위자료 6천만원, 얘기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인간에 대한 예의’ 없는 ‘상습 난폭운전자’ 재벌 2세가 언젠가는 항공사를 상속받게 된다!(그때 되면 다른 항공사에서 마일리지를 쌓아야 될지도 모르겠는걸).

어쨌든 그 두 가지 늬우스 중 하나는 예우의 문제, 하나는 예의의 문제가 되는데, 사실은 한 가지 결론으로 묶일 수 있다. 소수에 대한 특별대우는 다수에 대한 차별대우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는 것. 소수에 대한 특별대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순간, 보통 사람인 우리에 대한 차별대우를 스스로 묵인하게 된다는 사실.

사진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