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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에 부활한 왕룽일가, SBS <왕룽의 대지>

봉필이가 훤칠하게 컸구나

길을 가다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적이 있는지. 그들은 마치 졸업앨범의 앳된 모습에서 0.1초만에 세포분열을 백만번쯤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웃고 서 있다. 때가 꼬질꼬질했던 입술 언저리에 거뭇거뭇 난 수염이며 훌쩍 커버린 키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나이먹어 가는 동안 그들도 이땅 어디선가 그만큼의 세월을 안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2000년 새해 첫날, 10년 만에 만난 <왕룽일가>를 보면서 드는 생각도 그러하다. 89년 수많은 유행어와 인기를 누리며 방영되었다가 어느덧 우리의 기억 어딘가에서 먼지쌓인 채 박혀있는 줄만 알았던 왕룽 동네 사람들. 그들은 사실 우리와 함께 10년의 세월을 먹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10년, 강산이 변해도 안 변하는 게 있다

왕룽(박인환)은 아파트가 된 논, 밭에 대한 보상금으로 앉은 자리에서 몇십억대 갑부가 되었지만 철부지 아들 석구(선동혁)는 사업자금 대달라고 졸라대고, 그런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왕룽에게 평생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던 오란(김영옥)은 이혼하자며 으름장을 놓는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새로운 인물 댄스교습소 교하댁(김자옥). 그녀의 교태는 그만 평생을 수전노처럼 살아왔던 이 노랑이 영감을 스르르 무너지게 만든다.

“누님, 우리들의 사랑은 플라토닉한 거예요.” 쿠웨이트에서 날아와 ‘예술’로 은실네(박혜숙)의 ‘플라스틱 러브’를 녹여버린 물찬 제비 쿠웨이트 박(최주봉). 10년간 너무 ‘찍고 돌린’ 탓에 관절염이 생겨 다리를 절룩대는 노쇠한 제비 ‘절루 박’이 되었지만 이젠 영원한 누님 은실네와 둥지를 틀고 사는 텃새가 되었다. 이렇게 어른들은 바뀌고 아이들은 자랐다. 항상 반 누드로 동네를 활보하던 9살 봉필이는 어느덧 훤칠한 청년(장혁)이 되었다. 비록 엉뚱하고 사고뭉치이긴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땅을 사랑하는 신세대. 쿠웨이트 박의 아들 민호(소지섭)는 사법고시 1차를 패스한 법대생이 되어 이수(장항선)의 딸 화정(박시은)과 봉필이 사이에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어디 변하는 것만 있으랴. 왕룽의 딸 미애(배종옥)를 짝사랑 하던 원석 -일명 절구씨-은 브라질로 이민갔다가 이혼하고 딸만 데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그녀를 10년 전과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래, 그런 게 아니었을까? 10년이 지난 왕룽일가가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그렇게 변하는 것들 속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TV세대의 행운, 드라마와 같이 나이 든다는 것

10년 전 KBS라는 토양에서 <왕룽일가>를 비옥하게 일구어냈던 이종한 PD가 <왕룽의 대지>를 위해 SBS라는 새로운 땅에 쏟은 애정은 남다르다. 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걷고 낱알을 줍는 농부의 정성스런 마음처럼 그는 30부 안에 사계절을 모두 담겠다는 마음으로 봄 풍경을 찍기 위해 지난 5∼6월 초까지는 봄을(1회∼4회), 7∼8월에는 여름을(5회∼11회), 10월에 가을(12회∼20회)을 촬영했고 지금은 겨울(21회∼30회) 장면들을 만드느라 땀을 흘리고 있다. 사실 한국 TV 드라마의 제작 여건을 알 만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혀를 내두르는 일이 바로 방영 전에 총 30부 중 22부를 완성시킨 일이다. 이쯤되면 그 고집과 꼼꼼함이 드라마 속 왕룽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앗! 사실 쌍둥이가 한명 더 있다. 11년째 왕룽의 삶을 대신 살아가고 있는 박인환씨야 말로 또 다른 이름의 왕룽이다. 그가 왕룽과의 재회를 꿈꾸며 10년간 고이 모셔둔 상아빛 파이프를 들고 촬영장에 나타났을 때 이종한 PD를 포함한 모든 스탭의 입에선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왕룽일가>의 2부로 처음에 거론된 제목은 <굿바이 99>였다. 99년 말에 시작해서 새천년을 이을 작품이라서다. 그런데 제목에서 너무 <왕룽일가> 느낌이 안난다는 중론 때문에 <왕룽 99>로 바뀌었는데, 이것도 <파도>가 막판에 중년의 로맨스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연장되어 방영일이 다음해로 넘어가 2000년 1월로 결정되면서 <왕룽의 대지>로 바뀌었다. ‘왕룽일가’의 이름이 펄벅의 <대지>의 주인공인 왕룽과 그의 아내 오란에서 따 온 것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

<케빈은 열두살> 이라는 미국에서 만든 성장드라마가 있었다. 이역만리 미국땅에서 버터바른 빵을 먹고 크는 미국 아이의 일상과 우리의 그것이 어떤 공통 분모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꽤나 오래 그 드라마에 열중했다. 나이든 케빈이 내뱉는 유년의 회상 속에 열두살 ‘케빈은 열세살’이 되고 ‘열네살’이 되었고, 케빈의 귀여운 여자친구 위니는 방영을 마칠 즈음엔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물론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던 우리도 한해두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떤 이는 졸업을 하고 어떤 이는 대학을 갔으리라.

우리에게 <왕룽의 대지>는 단순히 쾌쾌묵은 드라마의 리바이벌이 아니다. 89년 우묵배미를 살았던 정겨운 사람들과의 재회이며, 그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을 때 우리주변에서 일어났던 소사(小事)들과의 아련한 시침인 것이다. 클로르포름 속에 박제된 드라마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숨쉬며 늙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드라마와 함께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 이것은 TV가 발명 된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 내린 특별한 즐거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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