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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없는 뻔할 뻔자, KBS1TV 대하역사극 <왕과 비>
2000-01-11

여기 한편의 드라마가 있다. 그런데 시청자가 결말을 미리 알고 있고, 중간에 일어날 사건도, 그리고 이야기의 반전이나 사건을 뒤집을 뜻밖의 인물도 다 알고 있다면. 과연 이 드라마가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무슨 되지도 않는 소리냐’ 싶겠지만 실제로 그런 드라마가 현재 방송되고 있고 또한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뻔한 결말, 단골 소재, 왜 시청자를 잡아 끄나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밤에 방송되는 KBS1TV 대하사극 <왕과 비>. 조선 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를 다룬 이 드라마는 앞에서 말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결말? 드라마의 복선? 반전? 온전히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마친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설마 연산군이 나중에 어머니의 모성 결핍을 딛고 착한 성군이 되어 할머니 인수대비를 극진히 모셨다고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굳이 역사강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시대 이야기는 정말 신물나게 드라마로 여러 번 만들어졌다. 예전 MBC에서 신봉승 극본의 <조선왕조 5백년>을 할 때 가장 인기 높았던 ‘설중매’편이 바로 인수대비의 이야기 아니던가? 당시 무명이던 한명회 역의 정진, 유자광 역의 변희봉이 그 역할 덕분에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유행어를 퍼트리며 CF를 찍는 등 무명의 설움을 떨쳤고, 그로부터 몇년 뒤 KBS에서 이덕화가 노련한 사극연기로 연기대상을 탄 것도 <한명회>의 타이틀롤 한명회였다. 그 외에 주호성이 한명회를 맡았던 <파천무> 등 세조에서 연산조에 이르는 조선 전기는 최근 10여년간을 짚어보아도 수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진 단골 소재였다. 그리고 이제 지금 그 시대를 다룬 또 한편의 드라마가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최근 시청률을 보면 오히려 전반기에 비해 상승세를 타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토록 뻔히 알고 있는 내용에 집착할까?

다른 드라마에서 찾을 수 없는 사극만이 지닌 고유한 재미를 꼽는다면 나는 ‘해석의 재미’와 양식미를 꼽는다. 이성계가 왕씨를 몰아내고 조선을 세우고, 세조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누구나 아는 역사적 사건이다. 진짜 재미있는 사극은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을 작가와 연출자의 상상력으로 얼마나 새롭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수대비가 며느리를 죽일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기 아들의 마음을 빼앗은 여인에 대한 질투와 복수심으로?’ 역사의 행간에 숨겨 있는 의미를 작가가 붙인 주석으로 살펴보는 것은 사극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매력이다.

또 하나의 멋은 특유의 양식미. 사극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건의 흐름을 좇기보다 유장한 호흡에 정제된 멋이 있는 사극 특유의 대사나 연기 자체를 즐긴다. 자유분방한 현대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형식과 틀을 갖춘 ‘각이 잘 잡힌’ 연기. 특히 사극을 오래 한 노련한 중견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면 특유의 리듬감과 노련한 대사가 참 멋스럽다는 생각을 준다.

말도 안 되는 궁중 여인의 질투, 무모한 권력욕

자, 이렇게 사극예찬을 했는데 그러면 <왕과 비>는 재미있는 사극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아니오”이다. 처음 드라마가 시작했을 때 작가는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대해 나름대로 당위성을 부여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것이 요즘 정국과 비교해 언론에서 비판을 하자, 슬그머니 춘추필법에 바탕을 둔 대의명분론으로 바뀌었다. 작가나 연출가의 시각이 옳고 그른 것이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한 시대를 바라보는 일관된 관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드라마에서 과연 어떤 시점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해석의 재미를 사극의 매력으로 꼽았지만, 어디가 새로운 해석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발견한 것이 있다면 히스테릭컬한 궁중 여인들의 웃음과 말도 안 되는 질투. 이와는 상대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가이자 기인으로 어떤 색깔의 인물로 등장할지 기대를 모았던 한명회와 유자광, 임사홍은 지극히 평범한 대본 속의 등장인물이 됐다. 드라마의 핵심인물인 인수대비의 무모할 정도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무엇인가? 시아버지 수양대군에 대한 한풀이, 남편을 일찍 여읜 여인의 콤플렉스, 아들의 여인들에 대한 삐뚤어진 질투, 아니면 왕권과 종묘사직에 대한 갸륵한 충정. 드라마를 여태껏 지켜보면서도 이중 어느 것이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사극의 또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양식미도 이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고풍스럽고 틀에 잡힌 대사와 연기가 펼쳐지다 보니 더더욱 해독 불가능이다.

사극이니, 트렌디 드라마, 홈 드라마니 나누자면 끝이 없지만 결국 다 사람사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인수대비니, 연산군이니 역사 속 호칭이 거창하지만 따지고 보면 남편 잃고 아이들 키워가며 힘들게 세상을 산 한 여인이고, 출생의 비밀을 모르고 성장한 상처받은 영혼의 젊은이가 아닌가? 사극에서 만나고 싶은 것은 그 시대에 숨쉬며 살았던 사람들이지, 곰팡내 나는 왕조의 실록에 묻혀 있는 박제된 영웅이나 폭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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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