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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걸작선>을 만드는 사람들
2001-07-26

망각의 강 건너, 한국영화의 부모를 찾아서

60, 70년대 한국영화 방송하는 EBS 프로그램 <한국영화 걸작선>이 궁금하다

● 일요일 밤 10시10분. 채널13으로 가보자. ‘한국영화 걸작선’ 두툼하고 육중한 고딕체 타이틀이 떴다가 사라지면, 중년 남자가 극장 객석 사이 통로를 걸어내려오며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그가 영화, 혹은 영화라는 이름의 추억 여행 가이드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 남자, 김홍준 감독은 객석에서, 영사기 옆에서, 그날의 영화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한국영화 걸작선’이라는 요리를 선택한 시청자들을 위한 전채인 셈이다. 그리고 메인 디시인 영화가 시작되고, 끝난다. 여기서 바로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끈다면, 그는 ‘초짜’ <한국영화 걸작선> 시청자다. ‘진득한’ 마니아들은 2, 3초 동안의 검은 자막을 지켜보며 한숨 돌린다. 달콤한 디저트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주 방영작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듣는 영화이야기나 김홍준 감독이 들려주는 남은 이야기들이 그것.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23일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을 방영했을 때는 신성일, 엄앵란 커플이 등장했다. 지난 7월15일 석래명 감독의 <고교 우량아>를 방영했을 때는 주연배우 김정훈씨가 인터뷰에 응했다. 조각 같은 미모의 청년 모습에서 곧이어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현재의 신성일씨, 그리고 소년 시절의 앳된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장년의 나이로 카메라 앞에 나타난 김정훈씨의 얼굴은 직전에 보았던 영화 속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아련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시청률을 뚫고

KBS <태조 왕건>과 ‘맞장뜨는’ 프로그램인 <한국영화 걸작선>의 조용한 혁명은 그렇게 7개월 넘게 계속되고 있다. 6월부터는 본방송을 일요일 밤 10시10분에 하고, 원래 본방 시간이었던 토요일 낮 12시에는 재방송을 하고 있다. “<한국영화 걸작선>이 방송타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다”라는 김홍준 감독의 평가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동안 공중파에서 한국영화가 찬밥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시청률이 원인이었으리라. 그러나 한국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무장한 몇몇 동지들의 ‘봉기’로, 지난해 12월9일 토요일 한낮에 작은 혁명이 발발했다. 시작은, 사랑이었다. 한국영화에 대한. <한국영화 걸작선> 이승훈 PD는 96년에서 97년 사이 <시네마 천국>에서 한국영화 작가 시리즈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김상옥, 임권택, 김기영, 김수용, 이장호, 정지영 등의 작품을 방송했는데, 한국영화 필름을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결국 비디오 출시된 것만 틀었다. 절름발이 방영을 한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그뒤로도 오랫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어떻게 <한국영화 걸작선>을 기획했나.

= 어떻게든 한국영화를 틀고 싶었다. 상시적 프로그램으로 안 되면 <세계의 명화>에 한달에 한번씩이라도 한국영화를 끼워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언젠가는 1회성 특집으로도 검토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것도 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12월에 소규모 편성 개편이 있었다. 그때 기획팀장이 개편에 맞추어 한번 추진해보라고 했다. 수급과 가격을 알아보니 다행히 예상 제작비와 맞았다.

일단 50, 60년대 영화 중 작품성과 흥행성, 감독 등을 안배하여 20∼30편을 추려냈다. 그리고 영화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11월쯤 영상자료원쪽과 만나 목록에 있는 작품들의 판권과 네거필름 상태 등을 확인했다. 판권계약과 텔레시네 작업까지는 배급업자에게 맡겼다. 첫 작품은 <마부>로 정했다. 첫 방송을 시작할 때까지도 확정된 리스트는커녕 당장 그 다음주에는 무엇을 할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매주 작품을 찾아 뛰어야 했다. 사정은 지금도 비슷하다. <카인의 후예> <명동 나그네>까지 7월 리스트는 정해져 있지만 8월엔 어떤 작품들을 할지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왜 <마부>였나.

= 일단, 많이 알려진 작품이었다. 사실 처음엔 <김약국집 딸들>을 먼저 하려 했다. 그런데 <김약국집 딸들>은 텔레시네를 해야 해서 방송시간에 맞출 수가 없었다. <마부>는 스탠더드 사이즈였다는 점에서 합격점이었다. 그리고 첫 방송이었기 때문에 좀더 대중적인 작품, 속된 말로 흥행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마부> 시청률이 2.4% 나왔다. 교육방송 평균 시청률 1%에 비하면 경이로운 수치였다. 격려성 전화, 사례성 전화세례도 빗발쳤다. 공군 예비역 장교 출신이라고 신분을 밝힌 어느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대한독립만세’라도 부르는 것 같았다. “이형(?), 잘했다! 정말 좋다!” 이후로도 시청률 2%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 옛날 영화니 나이든 사람들만 볼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진 않다고.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발견하곤 그 다음부턴 매주 챙겨본다는 젊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60년대 우리 영화, 이렇게 훌륭할 수가 있나요”란다. 전화로 다음주에 뭐하느냐고 물어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고 심지어 보도자료라도 보내줄 수 없느냐는 요청도 받는다. 제작은 외주업체인 브이투원에서 맡고 있다. 브이투원 윤팔남 PD가 연출을, 이승훈 PD는 기획을 담당한다. 한국영화를 트는 프로그램을 한다는 컨셉을 잡고 외주업체들에 세팅을 맡겼다. 경쟁률 10 대 1. 브이투원이 제출한 기획안은 인터뷰를 뒤에 배치한 포맷이 눈에 확 들어왔다. 대개 외주업체들이 영화 프로그램은 쉽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노하우가 없으면 안 된다. 자료가 잘못된 것도 너무 많은데 그걸 그대로 쓰기 쉽다. 그런 것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등 쉽지 않은 작업이다. 워낙 자료도 없고.

자료가 그렇게 없었나.

=변변히 믿을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한국영화 걸작선> 만들면서 딱 3번 놀랐다. “이렇게 영화를 잘 만들었을 수가!” “이렇게 자료가 없을 수가!” “시청자가 이렇게 많이 볼 수가!” 디비디비딥닷컴에 많이 의존했고, 정종화 선생님의 증언도 참조했다.

스크린 뒤의 두 남자 외에 시청자와 직접 마주치는 진행자도 중요했다. 처음에 물망에 올랐던 사람들은 이른바 당시 스타성 있는 사람들. 하지만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은 듯했다. 이승훈 PD는 김홍준 감독을 떠올렸다. 느낌이 통했을까. 어느날 교육방송 부사장이 복도를 스쳐지나가다 툭 던진 말, “진행자 생각했어? 김홍준 감독 어때?” 60, 70년대 한국영화에 조예가 깊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신뢰가 갔다. 김홍준 감독에게는 지난해 10월 부산영화제 때 만나서 운을 뗐더니, “한국영화에 관계되면 무보수라도 돕겠다”고 흔쾌히 승낙했다.

희·로·애·락, 그리고 에피소드들들들

프로그램을 만들다보면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쉴새없이 교차한다. <한국영화 걸작선>도 슬프기도 하고, 아찔하기도 했던 순간이 있다. 2월3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을 방영할 때였다. <춘향전>은 홍성기 감독의 내리막길이 시작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1961년작인데, 개봉 당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가 흥행에서 실패한 영화다. 2월3일 토요일 12시에 방송되기 직전 감독의 타계소식을 들었다. 김홍준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30분 전에 돌아가셨다고.

어떻게 대처했나.

= 사실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꼭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병원에 계셔서 못했다. 그래서 그냥 “쾌유를 빕니다”라는 자막을 집어넣은 상태였다. 급히 그 부분을 자르고 “홍성기 감독이 30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로 대치했다. 사실 조금만 늦게 돌아가셨으면 쾌유를 빕니다로 나갔을 것 아닌가. 돌아가신 분에게. 아찔했다.

오리지널 사이즈를 복원한 것은 정말 뿌듯하다. <맨발의 청춘> <김약국집 딸들> <갯마을> <춘향전> 등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를 그대로 방영했다. 왜 위 아래에 검은 띠를 두르느냐 하고 항의하는 시청자들도 있지만, 원작의 분위기, 감독과 촬영감독의 의도를 존중하고자 되도록이면 그대로 방영한다. 필름이 잘린 것도 그대로 내보낸다. 예를 들어 <남과 북>은 원래부터 중간에 1분 넘게 필름이 없다. 검열에서 잘려나간 것이다. 이 부분도 내보냈다. 대신 블랙 부분을 자막 처리했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블랙으로 나갑니다, 하고. 방영할 때 2대 원칙이 무편집, 무삭제다. 하지만 방송이다보니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을 경우가 있다. 원칙을 어긴 경우가 2번 있었는데 <팔도 며느리>와 <공처가 삼대>가 그것이다. 물론 감독이 생존한 경우엔 감독에게 미리 알려 허락을 구한다. 그리고 등급 고지 뒤에 삭제한다는 말을 내보내 시청자들에게도 알린다.

시청자들이 어디가 잘렸는지 알 수 있을까.

= <공처가 삼대> 때 홈페이지 게시판에 지난 4월 여성영화제에서 봤다며 어떤 분이 글을 올렸다. “두 장면이 삭제되었는데, 잠을 자다 깬 신성일씨가 꼬마 삼촌을 발견하고 아내를 깨워 꼬마 삼촌을 바닥으로 옮겨놓고 아내와 침대에 드는 장면에서 삼촌의 잠꼬대에 놀라고 나서도 정사장면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부분이 약간 잘린 듯하고요…, 남자들이 여관방에 모여 있을 때 혼자 빠져나온 신성일씨가 아내를 공원으로 끌고가 싸우다가 화해하고 여관에 간 장면에서도 둘의 정사를 의미하는 부분이 약간 삭제된 듯해 보입니다”라고. 정확했다. 가슴이 서늘했다.

시청자들 중에는 녹화하는 사람도 많다.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러닝타임이 정확하지 않아 녹화하다가 테이프가 끊겼다고 항의하는 글들도 눈에 띄며, 자신이 녹화한 영화들의 목록을 줄줄이 적고 미처 녹화하지 못한 것과 교환하자고 제의한 열혈 시청자도 있다. 그중 청운양로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다는 네티즌 김승희씨는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한국영화 걸작선>을 발견하고 보게 되었다면서, “… 물론 영화를 사랑하시고 공부하시는 분들에게도 반가운 일이지만 저희 양로원 어르신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잘 아는 옛 배우들이 화면에 나오자 너무너무 좋아하셨어요”라는 가슴 한구석이 짜해지는 글을 올렸다. 어떤 영화를 방영해달라는 요청 방식도 가지가지다. ‘극장장(이승훈 PD의 아이디)님 멋쟁이’ 운운하는 애교파, ‘안 해주면 굶어죽겠다’는 협박파도 있다.

제작과정 A to Z

대본 작가는 따로 없다. 이승훈 PD는 예전에 <시네마 천국> 시절에도 영화 마니아 중에서 작가를 선별해 썼고, 따로 작가를 두지 않았다. <한국영화 걸작선> 대본은 윤팔남 PD가 전담한다. 수급상황 등을 고려해 다음주에 상영할 영화를 정하면 먼저 테이프를 보고 이승훈 PD와 회의를 한다. 예를 들어 <고교 우량아>의 경우 누구를 인터뷰할까, 주연배우인 이승현, 김정훈씨는 어떨까. 각본을 쓴 윤삼육 작가는 어떨까, 둘 다 하자. 그렇게 해서 7월15일 밤, 시청자들은 70년대 상황과 <고교 얄개> 시리즈 등 당시 유행하던 하이틴영화는 70년대 억압된 현실에 해방되는 판타지였음을 김홍준 감독의 입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고교 얄개>의 엄청난 흥행에 고무된 제작사에서 <고교 얄개2>를 준비하고 있던 중에, 다른 영화사(삼양)에서 원작자 조흔파 선생, 석래명 감독, 윤삼육 작가를 스카우트해 가버린 거야. 이에 놀란 연방은 작가를 다시 스카우트해 와 <고교 우량아>를 만들었지. 감독과 원작자는 포기하고 대신 캐스팅을 그대로 가는 선에서 아쉬운대로. 그래서 이승현, 김정훈이 그대로 캐스팅되어 갔지.” <고교 우량아>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윤삼육 작가가 들려줬다.

7월 마지막주에는 <명동 나그네>를 방영할 예정인데, 조영남씨가 신성일씨 흉내내면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니, 조영남씨를 섭외하면 어떨까 이야기하고 있다고. 이 PD와 김홍준 감독에게도 VHS 테이프를 복사해서 미리 준다. 그리고 대본을 작성하고, 촬영장에서 슛 들어가기 전에 다시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이승훈 PD는 <한국영화 걸작선> 잘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저 불씨를 댕긴 것뿐이다. 좋은 점이 있다면 한국영화사에 DVD나 책 등 자료출시 기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말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들은 60년대 모더니스트인 이성구 감독, 60년대 코미디영화의 대가 이봉래 감독, 그리고 <서울의 지붕 밑>을 만든 이형표 감독 등이다. 김기영 감독 작품은 방영 요청도 많고, 가장 하고 싶은 감독인데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 못 하고 있다. 방영시간과 심의등급이란 걸림돌도, 작품 화질과 음질이 안 좋은 것도 모두 안타깝다고.

불씨를 댕겼다, 불꽃이 타올랐다

몇 사람이 댕긴 한알의 불씨가 어떤 불꽃으로 타오를지 <한국영화 걸작선>을 시작할 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육방송 내부의 평가대로 ‘50대 후반 이후 장년층의 20, 30대 때의 잃어버렸던 문화를 되찾아줬다’는 데에는 누구도 의의를 달지 않을 듯하다. 물론 더러 ‘걸작선’이라는 이름이 무거운 듯한 영화도 있고, 지금 감각으로만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영화도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한국영화 걸작선>은 그동안 잊혀졌던 지난 시대의 한국영화들이 오늘의 관객과 수인사를 했다는 점만으로도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충무로가 향유하고 있는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아버지 어머니가 거기 있었고, <한국영화 걸작선>이 잃어버렸던 그때를 복원했다면, 한국영화 미학의 젖줄을 다시 발견했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글 위정훈 기자 oscarl@hani.co.kr·사진 손홍주 기자 lightson@hani.co.kr디자인 한정연 han732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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