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포커스
무협소설 대표작가 2인 [1] - 김용

현대 무협소설의 두 거두 김용·양우생의 세계

강호는 더이상 그 옛날의 강호가 아닌지라 무협 일파들은 천차만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또 번성하였다. 그 와중에 제각각 자신을 제일이라 칭하는 자들이 곳곳에서 출몰하였다. 그러나 그 무공 중 과연 천하 제일은 누구인가? 산을 옮기고, 하늘을 가르고, 의를 세우는 무협세계의 진정한 영웅호걸은 누구인가? 이제는 강호를 떠나 병풍 속의 신선이 되어버린 신파 무협소설의 양대 신필, 김용과 양우생. 그 둘을 말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무와 협의 세계를 말할 수 없을 터, 그들의 초식과 무공을 지금 이 자리에 낱낱이 다시 소개한다. 무림 대중이여, 이것을 필독하는 것이 진정 첫 번째 초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편집자

현대 무협소설의 한획을 그은 거장 김용

어지러운 천하에는 영웅이 필요한 법, 20세기 초 나타난 무협소설의 군웅들이 하나둘 스러져간 1950년대, 홍콩에서 양우생과 김용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다. 용호상박의 형국이었지만, 세인들은 누구나 김용()을 한 위로 평가했다. 중국소설의 정수인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을 ‘홍학’이라 부르듯 김용의 소설을 연구하는 학문을 ‘김학’이라 칭하며 <김학연구총서>가 발간되었고, 버클리와 프린스턴대학 등에서 중국학의 부교재로 쓰일 정도로 탁월한 평가를 받았다.

허점을 찾을 수 없는 신의 경지

1924년 절강성 해령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김용은 유년 시절부터 사서삼경과 제자백가, 불교와 도교의 경전을 섭렵하며 내공을 다졌고, <강호기협전>과 <근대협의영웅전>을 읽으며 무협지의 기본 초식을 익혔다. 대학에서 영어를 익혀 항주 <동남일보>의 기자로서 번역과 통역을 도맡을 정도로 사통팔달했던 김용은, 양우생에 비하여 영화를 포함한 서양 문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의 무협소설은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도저히 허점을 찾을 수 없는 금강불괴의 경지에 올랐다. 김용의 소설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허공을 날고 산을 옮기면서도, 만고불변의 이치와 불과 물처럼 마구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까지 부드럽게 잡아낸다. ‘칼과 검의 그림자가 번득이는 소용돌이에서도 인간성의 가장 순결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 능하고, ‘웃고 떠들고 화내고 욕하는 것이 모두 문장이 된다’는 찬사는 과장이 아니다. 김용의 내공과 천변만화하는 초식은 이미 우화등선의 경지에 이르렀다. 가히 ‘상상력은 초범입성의 경지이며, 동서고금이 한 용광로 속에서 녹아’나는 것이다. <사조영웅문>의 칭기즈칸이나 <의천도룡기>의 주원장처럼 실제 인물이 등장하여 무협소설을 역사적 공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실력도 탁월하다. 김용의 소설은 인물의 풍부함과 천의무봉의 이야기, 그리고 심오한 세상인식과 사려깊은 감정의 표현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보통의 무협지만 보았다면, 김용의 무협지를 읽는 순간 내공이 두세 갑자는 단번에 높아질 것이다.

김용이 그려내는 강호는, 현실과 다를 바 없다. 무협소설과 정치평론을 함께 썼던 이력답게, 김용은 무협소설을 통해 날카롭게 현실을 풍자한다. ‘무협소설에 그리 가깝지 않고 역사소설에 가깝다’고 말한 <녹정기>의 위소보는 유들유들한 말솜씨, 무궁한 계략, 임기응변 즉 꾀와 거짓말로 뛰어난 무공의 대가들을 물리치고 부와 명예를 얻는다. <소오강호>의 ‘무초가 유초를 이긴다’는 가르침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초식은 무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모와 계략 속에 있다는 말로도 통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탁월하게 그려낸 김용은 이미 선계로 진입하여 더이상 무협소설을 쓰지 않고, 최근에는 중국 통사에 전념한다고 한다.

대표작 <사조영웅문>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의천도룡기>

김용의 무공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55년의 <서검은구록>이다. 이후 17년간 15편의 무협소설을 발표한 김용은 신필이란 찬사를 받으며 천하를 제패한다. 그는 결코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지 않고,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녹정기>를 다른 작가가 쓴 것이란 소문이 돌 정도로 작품마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며 환골탈태했다. 김용은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완벽하게 화룡정점을 찍었다. <월녀검>을 제외하고 14편의 소설 제목 첫자를 모으면 ‘飛雪連天射白鹿 笑書神俠倚碧鴛’(비설연천사백록 소서신협의벽원)이란 시구가 만들어진다. ‘하늘 가득히 눈이 휘몰아쳐 흰 사슴을 쏘아가고, 글을 조롱하는 신비한 협객이 푸른 원앙새에 기댄다’는 뜻의 시구는 김용 소설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김용의 모든 소설이 걸작, 수작이지만 굳이 최고를 꼽는다면 ‘사조삼부’인 <사조영웅문>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들 수 있다. 대를 이어가며 진행되는 ‘사조삼부’는 의형제 곽정과 양강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강남칠협에게 키워진 곽정과 금의 왕가에서 양자로 자라난 양강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끊임없이 얽혀든다. 김용의 소설은 ‘필력이 넘치고 기기묘묘하며 변화무쌍하고 웅장하기 짝이 없다.’ <사조영웅문>은 이야기의 꼬리가 꼬리를 무는 것은 물론 작은 사건이나 단서들이 복선으로 활용되고, 인물들의 관계가 겹치고 또 겹치면서 도화도의 미혼진 속에서 헤매는 느낌이다. 또한 ‘사조삼부’는 진정한 협지대자(俠之大子) 곽정만이 아니라 영악하고 어여쁜 여인의 전형 황용 그리고 무림의 최고수인 동사서독과 남제북개 그리고 중신통 등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다. 그들의 복잡한 관계를 파악하기까지가 힘들지만, 일단 그들의 무공에 익숙해지면 단번에 기가 뚫려 마지막까지 줄달음치게 된다.

<소오강호>와 <녹정기> 또한 김용의 걸작이다. <소오강호>는 <천룡팔부>처럼 무림인들이 서로 당파를 이루어 음모를 꾸미고, 싸우는 작태를 보여준다. 영호충은 그런 강호에 실망하여 크게 웃으며, 노래를 부르며 떠나가려 한다. 김용의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녹죽옹이 음악의 율과 오음 밎 오조를 이야기하는 장면, 항문천이 바둑을 이야기하는 장면 등을 통해 중국의 전통문화인 그림과 바둑, 음악과 희곡 등에 능통한 김용을 만날 수 있다. <녹정기>는 기존 무협소설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협이다. 삭철여니라는 비수와 호신보의라는 갑옷에만 의존한 위소보는 계략과 재치로 무림을 장악하고, 천자의 친구가 되어 명예까지 얻는다. 아무리 무공에 강해도 총과 대포로 무장한 현대군에는 당할 수 없듯이, 아무리 구음진경을 익혀도 세상을 얻을 수는 없다.

캐릭터와 무공

무협지의 등장인물은 크게 대협과 악인으로 갈린다. 하지만 김용의 소설에서는 구분이 모호한 인물이 많다. <사조영웅문>의 곽정은 대표적인 대협이다. 하지만 <소오강호>의 영호충은 어지러운 강호를 떠나고 싶어한다. 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칼을 내던지고 초야에 묻히려는 것이다. <신조협려>의 양과는 심지 굳은 의인이라기보다는 성품이 거칠고, 행동이 괴팍한 현대의 젊은이를 닮았다. 서독인 구양봉은 대표적인 악인이다. 남개인 홍칠공과 무공을 겨루다가 불이 붙은 돛대에 깔린 구양봉은 도움을 받아 살아난다. 하지만 그 틈을 타 구양봉은 홍칠공을 사경에 몰아넣는다. 우리에겐 <동방불패>로 널리 알려진 임아행은, 강호를 횡행하며 안하무인한다는 뜻의 이름부터 악인임이 드러난다. <의천도룡기>의 멸절태사 역시 마찬가지.

<사조영웅문>의 황용, <녹정기>의 위소보, <소오강호>의 영호충 (왼쪽부터)

특이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실력도 탁월하다. 여주인공인 황용, 곽부, 조민, 주지약 등은 청순가련이나 강하기만 한 여인이 아니라 독하면서 영악한 여인네들이다. 황용의 아버지 동사 황약사는 사파의 거두인 동시에 선과 악 모두를 아우른다. <녹정기>의 위소보는 선과 악을 떠나, 과연 이런 인물이 영웅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한 <천룡팔부>에는 전혀 무공을 못하지만 모든 무학에 통달한 왕어언이라는 여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협객행>에는 일자무식이지만 오히려 그 덕에 비급의 의미를 단박에 깨닫는 고수 석파천이 나온다. 단지 기괴한 인물을 창조하기만 하는 싸구려 무협지와는 달리, 김용의 인물들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김용이 창조해낸 무공은 과거의 무협지에도 기반을 두고 있지만, 경전이나 시부 등에서 의미를 빌려온 것들이 많다. ‘형상과 자세에서 뜻으로, 실에서 허로 자유자재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시정이 넘쳐 우아하기까지 하다’는 평이다. 두꺼비를 본뜬 합마공, 미꾸라지를 연상케 하는 니추공, 상대의 힘을 빨아들이거나 이용하여 공격을 되돌리는 흡성대법과 건곤대나이, 장력과 지력으로 기를 발출하여 적을 죽이는 화염도와 육맥신검 등은 보는 것만으로 진기하다. 홍칠공이 곽정에게 가르친 항룡십팔장의 잠용물용(潛龍勿用), 항용유회(亢龍有悔)는 <역경>에 나온 것이고, 북명신공은 <장자>의 ‘소요유’ 편에서 따왔고, 능파미보는 조식의 ‘낙신부’에서 인용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신조협려>에서 양과가 창안한 암연소혼장이다. 강엄의 ‘별부’에 나오는 ‘슬퍼서 넋이 빠진 것은 이별했기 때문이다’란 구절에서 빌려 암연소혼장이라 이름붙인 양과는 소용녀와의 이별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지경이다. ‘음한탄성’, ‘육신불안’, ‘심경육도’ 등이 그런 심정의 표현이다. 그래서 암연소혼장을 구사하는 이의 마음에 진정한 이별의 애끓는 고통이 있어야만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한국의 무협소설 작가

한국이 내놓은 최고의 고수 좌백

중원의 김용과 양우생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멀리 변방의 한국에도 나름의 절세고수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좌백은 단연 최고수라 할 것이다. 95년 <대도오>로 데뷔한 좌백은 중원의 무협과 다르고, 이전의 한국 무협과도 다른 지평을 달려갔다. 주인공 대도오는 비천한 출신의 하급무사다. 흑풍조라는 조직에 속한 대도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다. 거대한 의와 협을 이루어내기 위한 전진이 아니라, 자존심을 걸고 생존해나가는 것에 주력한다. 무공이 높아져도, 어떤 세력과 싸워 이겨도 대도오는 영웅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이 이겨도, 세상이 변하는 것은 없다. 그들은 그저 그 안에서, 자신이 살아갈 작은 영토를 얻었을 뿐이다. 그것은 <소오강호>의 영호충이 보여준 은자의 자세와도 다르다. 대도오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것을 막는 자들과 싸우고, 살아남을 뿐이다.

<생사박>의 주인공인 불구의 파계승 흑저 역시, 기존 질서의 무너짐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혁명이나 정의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자신을 파계시킨 소림사로 귀환하는 것만이 목적이다. 모든 무공을 잃더라도. <독행표>는 80년대의 한국 무협 스타일을 견지한 작품이다. 멸문한 표국을 되살리려는 유일한 생존자인 용유진이 성장하여 고수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무협지적 구성. 하지만 훨씬 정교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용유진은 황제의 곁에서 나라를 운영하기보다 표국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복수에 관한 이야기인 <혈기린외전>도 단지 복수의 과정만이 아니라, 복수의 의미를 심각하게 되묻는다. 의와 협이라는 과거의 가치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짚어보는 것이다. 최근작인 <천마군림>에서는 한국의 고대사를 연결시켜 새로운 무협에 도전하고 있다. 좌백의 가치는, 단지 걸작 무협소설의 탄생만이 아니라 무협이 한국인인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