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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레슨’을 받다 [1]

탱고에 갓 입문한 기자, <탱고 레슨>의 파블로 베론을 만나다

샐리 포터 감독의 <탱고 레슨>은 수많은 탱고 마니아들을 양산한 탱고의 이상향 같은 영화다. 영화 안팎에서 샐리 포터에게 탱고를 가르치는 파블로 베론은 <탱고 레슨>에서 주연을 맡은 뒤 세계 제일의 탱고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공인’받게 됐다. 아르헨티나, 프랑스, 캐나다의 세 나라를 거점으로 공연, 강습, 안무를 거듭하며 숨가쁜 스케줄을 보내는 그가 국내 탱고 마니아의 끈질긴 섭외로 아시아 최초로 내한했다. 하지만 그의 방문은 요란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황홀하게 국내 땅게로스(탱고를 추고 즐기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돌아갔다. 올 여름 <탱고 레슨>을 계기로 탱고계에 입문한 ‘초보 땅게로(탱고를 추고 즐기는 남자)’ 이성욱 기자가 파블로 베론을 취재한 뒤,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탱고 입문기를 작성했다. 탱고 문화를 좀더 많은 이들과 나눠보자는 취지다.

P.S 탱고 동호인들은 스스로 지은 닉네임을 실명처럼 사용한다. 주어진 세계가 아닌 스스로 선택한 세상을 만들고 즐기겠다는 것이다. 나이나 직업 같은 ‘속세’의 가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기사에도 그들의 닉네임을 실명처럼 사용했다.

첫 만남은 낯설고 이상했다. 2년전 작고 근사한 와인바에서 열린 송년모임. 충무로의 여성 프로듀서 몇몇이 마련한 아담한 자리였다. 성의껏 회비를 내고 와인을 홀짝이며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는 풍경은 이제껏 겪었던 소란투성이 송년회와 달랐다. 슬쩍 기분이 달아오르는데 주최측의 예고없는 ‘공연’이 벌어졌다. 외국 손님과 여성 프로듀서 두쌍이 스텝을 밟기 시작했는데 그건 여느 ‘블루스 타임’이 아니었다. 탱고였다. 첫 느낌은 대충 이랬다. ‘특이하군.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영화에 걸맞게 감히 상상 못했던 방식의 레저를 즐기는군. 음~, 신기한 광경이야.’

“혹시 알아, 멋진 연인을 얻을지”

파블로 베론

이렇게 첫 번째 스승 ‘마야’를 만났다. 마야는 이날 몸소 탱고 댄스를 실연한 동갑내기 프로듀서. 얼마뒤 만난 그녀는 결정적 멘트를 날렸다. “탱고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아. 나 주말마다 탱고 추러 탱고바에 가거든. 이제 외롭지 않아. 에로틱하기도 하고. 지금, 이상한 생각하지? 사람들 매너 아주 좋아. 춤만 추고 온다니까.” 마야는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미모의 여인이다. 그런 그녀를 춤만으로 만족시켜주는 탱고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와 어울리는 땅게로스들은 또 얼마나 훌륭할까? 그렇다면, 나의 지리멸렬한 미래를 탱고로 위로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알아, 멋진 연인을 얻을지…. 음흉한 생각 끝에 문득 결심했다. “나도 배워볼까?” “그러렴.”

맘은 동하였으나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마야가 듣고 있는 레슨에 동참하기로 두어번 희미하게 약속을 잡았으나 번번이 좌절됐다. 외조모상 같은 일로. 사그러들던 욕망을 다시 불러세운 건 역시, 친절한 마야였다. “내가 탱고를 시작하게 된 게 <탱고 레슨>을 보고나서거든. 너무 멋있어. 함 봐봐.” 어느날, 마야는 <올란도>의 페미니스트 감독 샐리 포터가 주연까지 한 <탱고 레슨>의 비디오를 빌려줬다. 영화기자인지라 탱고보다는 감독의 자전적인 드라마가 먼저 와닿았다. 물론 소득은 있었다. 탱고는 몸뿐 아니라 심리적 조화를 요구한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내 보기에 멋진 공연을 마친 파블로 베론이 파트너인 샐리 포터에게 공연을 망쳤다며 엄청난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닌가(샐리 포터는 빼어난 탱고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파블로 베론에게 탱고를 배웠고, 실명으로 영화를 찍었다). “그냥 나만 따라오라고 그랬잖아. 그렇지 않으면 내 동작도, 내 자유도 망친다니까.”

마야의 견학 권유로 밀롱가(댄스파티)가 열리는 홍대 앞 ‘오나다’를 찾았다. 추측했던 대로 땅게로스들의 자태는 훌륭했다. 인상적인 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오픈 포지션이 아니라 A자형으로 상체를 모아 밀착시킨 밀롱게로 스타일로 춤을 즐기고 있다는 거였다. 남세스러웠다. 그리고 부러웠다.

올 봄, 마야는 아르헨틴 탱고의 ‘성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먼 순례를 다녀왔다. 그의 대단한 열정과 대비되는, 나의 성의없는 욕망을 더 미뤘다가는 흐지부지 사그라들 것 같았다. 사회적 지위와 나이에 걸맞게 개인레슨으로 걸음마를 띄겠다고 건의했다. 좋은 선생을 찾아보겠다더니 드디어 연락이 왔다.

하나의 심장 그리고 네개의 다리

자정 무렵, 정장을 입은 파블로 베론과 노엘 스트라사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10여분 동안 그들이 선보인 4곡의 공연 내내 탄성이 끊이지 않았고, 공연이 끝나기 무섭게 기립박수가 나왔다.

두 번째 스승이자 영원한 사부가 될 수밖에 없는 페닌슐라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실제 직업은 교사이나 탱고에 관한 한 국가대표급 ‘땅게라’(탱고를 추고 즐기는 여자)라는 게 사전정보의 전부였다. “왜 개인레슨을 받으려고 하세요?” “제가 좀 내성적이고… 또….” “그런 이유라면 단체 레슨이 더 나을 것 같네요.” 단호하고 명쾌한 거절의 목소리에 ‘빠른 시간에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뜻을 주섬주섬 전했더니 첫 레슨 약속을 잡아줬다. 나중에 알았다. 5년전 탱고를 시작한 그녀가 지난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날아가 세계탱고대회 준결승까지 올랐다는 걸, 그녀 역시 알 파치노의 <여인의 향기>와 <탱고 레슨> 같은 영화로 탱고에 매혹됐다는 걸, 2800명의 회원이 가입한 다음 카페 ‘땅고 아르떼’를 만들고 공연단까지 꾸렸다는 걸.

6월 초여름의 첫 레슨. ‘살리다’로 부르는 기본 동작을 순식간에 알려준 아름다운 그녀가, 아니 사부가 부끄럽게도 내 윗가슴에 턱 손을 얹었다. “가슴으로 미는 듯 리드의 느낌을 전하는 게 중요해요. 한번 해보세요.” 첫 탱고 레슨이 끝나고 사부가 메일을 날렸다. “탱고에 대한 묘사들 중에 ‘하나의 심장 그리고 네개의 다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 처용가에서 읊조려졌음직한 남녀가 어우러지는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느낌이라기보다 음악이란 코드 안에서 하나로 조율되는 두 사람의 가슴을 강조하는 묘사인데, 성욱님은 탱고의 박동을 닮을 좋은 가슴을 가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격려 메일을 받고 그만 ‘자뻑’하고 말았다. 6개월 안에 탱고계의 다크호스가 되리라고. 춤을 춰보면 상대방의 지능까지 느낄 수 있다는 사부의 말에 난 저능을 들키지 않기 위해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고, 매 레슨마다 사부는 ‘무이 비엔’(아주 훌륭하다)을 연발했다.

<탱고 레슨>

<탱고>

한달쯤 뒤 사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갔고 레슨은 중단됐다. 사부는 “<탱고 레슨>도 좋지만 카를로스 사우라의 <탱고>도 아주 좋아요. 꼭 구해보세요”라는 말을 남겼고, 후배가 구해준 <탱고>를 ‘얼마나 훌륭하길래’ 하는 발칙한 심정과 영화기자라는 자가 도대체 본 게 없네, 라는 부끄러운 맘으로 비디오를 돌렸다. 입문한 뒤였기에 더 잘 보였으리라. <탱고>는 영화로도 좋았지만 탱고의 새로운 경지였다. 후안 카를로스 코페스와 훌리오 보카의 춤은 누군가의 표현대로, ‘육체로 쓰는 가장 아름다운 시’였다. 여백의 미를 발하는 그림이었다. <탱고 레슨>에서 파블로 베론이 “빠름은 느림에서 출발한다”고 했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싶었다. 또 마피아와 군인을 빗댄 아르헨티나의 슬프고 고단한 역사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었는데, 그건 사부에게 들었던 탱고의 험난한 탄생과 성장을 은유하고 있었다.

영화 속의 오만한 파블로 베론은 없었다

세 번째 스승 ‘듀크’와 ‘우주소녀’를 만났다. 이들은 몸으로 박자를 늘리거나 쪼갤 수 있다는 걸 체험하게 해주었다. 멈추어선 여백과 번개 같은 강약의 조화를 감지하게 해주었다. 같은 곡이라도 절대로 반복될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즉흥 연주, 그러나 천국과 지옥을 순식간에 오갈 수 있는 ‘3분간의 연애’는 그렇게 이뤄지는 거였다.

그 즈음, 페닌슐라가 놀라운 소식을 안고 돌아왔다. 당대 최고의 땅게로, <탱고 레슨>의 파블로 베론이 자신의 오랜 파트너 노엘 스트라사와 함께 아시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해 몸소 강습과 공연을 하기로 했다는 거다. 페닌슐라와 더불어 ‘땅고 아르떼’를 가꾼 뒤, 직장을 접고 탱고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인 반도네온을 공부하러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레오’와 작전 개시 3년 만에 이룬 개가였다.

파블로 베론의 인터뷰를 일찌감치 찜해놓고 복습하는 자세로 <탱고 레슨>을 다시 틀었다. 아~, 간사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눈이여. 다시 본 <탱고 레슨>은 <탱고>보다 훨씬 아름답고 섬세했다. <탱고 레슨> 안에서 스릴러 시나리오를 쓰던 샐리 포터는 오만한 할리우드와의 영화제작을 포기하고 탱고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맘먹고는 파블로 베론에게 “이젠 내가 리드할 차례”라고 선언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함께 간 이들은 또 다른 2명의 남자 댄서와 더불어 ‘하나의 가슴과 여덟 개의 다리’를 기막히게 교차하며 황홀한 4인 탱고를 안무해낸다. 또 파블로 베론이 샐리 포터를 위해 요리하며 추는 탭댄스는 매혹적이고 드라마틱한 쇼였고, 샐리 포터는 남성 리드와 여성 팔로우로 분할된 탱고의 어쩔 수 없는 마초성에 대한 고민을 드라마 안에 섬세하게 녹여냈다.

워크숍 시간에 간편한 힙합 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파블로 베론. 노엘 스트라사와 함께 땅게로스들의 탱고 동작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수정해주었다.

부산영화제가 한창이던 8일 저녁 7시께 서울 서초동 토탈댄스협회 스튜디오. 힙합 바지를 입은 파블로 베론의 워크숍이 한창이다. 영화로 치면 하나의 신에 해당하는 하나의 패턴을 노엘 스트라사와 보여준 뒤 따라 하는 땅게로스들의 자세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수정해준다. 세 번째 스승 듀크는 “스텝이 좀 다르다. 2% 부족하다고 느꼈던 사까다(Sacada, 다리와 다리를 맞닿게 하거나 어느 한쪽을 걷어내는 동작)를 비로소 완성시킨 듯한 느낌”이라며 흐뭇해한다. <탱고 레슨>에서 보았던 오만하고 독선적인 파블로 베론은 거기 없었다.

같은 날 밤 자정 무렵, 150여명의 땅게로스들이 자신들의 밀롱가를 마무리하고 정장을 갖추고 나타난 파블로 베론과 노엘 스트라사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10여분 흘렀을까. 연속된 4곡의 공연 내내 탄성을 자아내던 땅게로스들은 기립박수로 환호했고, <너는 내 운명>을 봤을 때도 멀쩡했던 내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춤 구경이 처음은 아니었다. 뉴욕에서 온 현대무용 <빌보드>와 러시아에서 온 고전무용 <호두까기 인형>은 밋밋했다. 차라리 안은미의 <춘향>이 눈을 자극했더랬다. 그러나 이제껏 가장 큰 감동은 영국에서 온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였다. 대머리 남성 백조들의 에너지는 놀라웠고, 스토리는 쉽고도 새로웠다. 그런데 파블로 베론은 단 10분 만에 그 감동을 압도해버렸다. 예술의전당이나 국립극장은 아니었지만, 땅게로스만을 위한 그의 공연은 나의 탱고 입문기에 확실한 방점을 찍어줬다. 이틀 뒤 그를 만났다.

통역 구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