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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가 좋은 진짜 이유
2001-08-02

2001 클리오광고제에 입상한 퀴즈쇼 관련 CF 2편

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미국 Fox Sports 대행사 Cliff Freeman and Partners, New York 카피라이터 Richard Bullock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ric Silver 디렉터 Rocky Morton

아주 어린 여자아이가 퀴즈를 낸다. “아빠가 일어서면 엄마는 책을 봐요. 뭐게요?” 밑도 끝도 없는 뚱딴지 질문에 어른들이 진땀을 뺀다. 도대체 이 꼬마 녀석, 생각주머니 속엔 뭐가 들어 있는지? 정답은 세 글자, ‘노래방’이다. 또다른 문제 하나. “계단을 올라가면 사람들이 자고 있어요.” 역시 만만한 문제는 아니다. 아이가 생각하고 있는 정답이 ‘버스’라는 걸 알고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친다. 요즘 방송되는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 내용이니까 한번이라도 본 이들에게는 장황한 설명일지 모른다.

아무튼 죽을 힘을 다해 머리를 굴려도 안 풀리다가 정답이 공개되면 당했다는 듯이 무릎을 치는 게 퀴즈의 묘미다. 다 아는 문제였는데 워낙 긴장해서 못 풀었다느니, 착각을 했다느니 선수의 핑계도 가지각각이다. 바둑 두는 사람에겐 수가 안 보이지만 훈수 두는 사람에겐 묘수가 빤히 보이는 것처럼 퀴즈도 마찬가지다. 장외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입이 간질거려 미칠 지경이다. ‘아유, 병신∼ 저걸 몰라?’ ‘어유, 속터져. 내가 나갔으면 장원이다. 장원!’

성질급한 사람은 죽어버려!

사람들의 바로 그런 잘난 체하는 행태를 절묘하게 그려낸 CF가 올 클리오광고제에서 상을 탔다. 먼저 은상을 받은 <게임쇼 네트워크>(Game Show Network) TV-CM이다. 사람들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다. 요리를 하던 주방장, 쇼핑하던 주부, 벤치에 앉아 쉬던 노부부, 슈퍼에서 카운터를 보던 주인아저씨, 병원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던 미용사 등이 뭔가를 쳐다보며 외쳐대고 있다. “바튤리즘!” “바튤리즘!” 식중독의 일종이라는 뜻은 누군가의 귀띔으로 알아냈지만, Botulism이라는 철자가 웬만한 영어사전에도 안 나오는 걸로 봐서 꽤 어려운 단어인가 싶다. CF의 반 이상을 그런 난동으로 장식하다가 삑 하는 부저와 함께 사회자가 화면에 나타나 정리를 한다. “살모넬라!”(Salmonella!)

알다시피 식중독을 일으키는 병원균의 한 이름이다. 내용인즉 사람들이 TV를 통해 퀴즈쇼를 보다가 정답을 외쳐대고 있었던 것이다. 퀴즈는 식중독이라는 증상이 아니라 그런 증상을 일으키는 세균이름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퀴즈는 성질급한 사람 죽이는 데는 뭐가 있다니까. 우리가 집에서 TV를 보면서 해대는 짓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지금도 우리 집사람은 <도전! 주부퀴즈>인가 뭔가 하는 프로가 나오면, 요리하다가 손을 베고 설거지하다가 접시를 깨고 밥을 먹다가 국을 엎을 지경까지 흥분상태에 접어든다. 자막이 바로 그런 치기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콱 찔러주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다는 걸 안다”(You know you know)(<광고1>).

퀴즈, 현금으로 가는 길

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미국 Game Show Network 대행사 TBWA/Chiat/Day, San Francisco 카피라이터 Jeremy Postaer 프로듀서 Betsy Beale 디렉터 Roman Coppola

퀴즈쇼를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내셔널리그 박찬호의 야구게임을 보는 거하고 똑같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하게 만들기론 스포츠, 스크린, 섹스에 추가해도 좋을 또 하나의 마약이다. ‘퀴즈가 좋다’는 사람들의 속내는 ‘현금이 좋다’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평소에 조신하던 사람도 퀴즈쇼에 나와서는 꽝의 위험을 무릅쓰고 달인의 단계를 탐하는 것 아니겠는가? 퀴즈가 좋은 것 또 하나. 언론개혁이 맞는지 언론탄압이 맞는지, 어떻게 하면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경제를 회생시킬 묘안은 없는지, 뭐 그런 골치아픈 문제는 출제되지 않아서 좋다. 누구나 좋아하는 스포츠에 관한 문제라면 금상첨화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폭스 스포츠(Fox Sports)라는 채널의 퀴즈쇼 프로겠는가? 금상을 차지한 이 프로그램 TV-CM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열차 한쪽에 젊은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다. 맞은편에는 얌전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앉아 있다. 갑자기 아기가 칭얼대자 여자는 가슴을 헤치더니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민망해 하는 청년. 그때 아줌마가 말을 걸어온다. “저, 실례지만… 혹시 이번 슈퍼볼에서 우승한 팀 이름 알고 계세요?” 뭐 이런 행운이 다 있어?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는 척하면서 여인의 가슴을 훔쳐볼 찬스를 얻었으니… 이때 자막이 한몫 거들고 나선다. “모든 질문이 스포츠에 관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시리즈의 또다른 CF 한편. 청년 한명이 윗통을 벗고 소파에 누워 우유를 먹다가 몸에다 흘린다. 액체는 공교롭게도 녀석의 젖꼭지 부근에 고인다. 이 틈을 놓칠세라 지나가던 고양이 녀석이 냉큼 가슴팍으로 올라와서 우유를 핥기 시작한다. 날름날름… 촉감으로 전해지는 혀의 느낌이 묘한 쾌감을 주는가보다. 지그시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순간, 애인이 지나가다가 이 꼴을 보더니 한마디 던진다. “제프….” 당황하는 사내. 그런데 여자가 던진 질문이 참으로 뜬금없다. “어느 팀이 아이스하키에서 스탠리컵을 차지했지?” 시리즈로 나온 광고들이 죄다 이렇게 짓궂다. 아버지가 아들과 열심히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에 늑대의 교미장면이 나온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채널을 돌리기도 뭐한 순간에 아들이 던지는 질문 하나. 이럴 때 그 질문이 스포츠에 관한 것이라면 그보다 더한 구원이 있을까?

이현우/ 프리랜서 카피라이터·광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