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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식 멜로드라마 <렌의 애가>
2001-08-09

사랑, 혹은 가학과 피학의 이중주

1969년, 감독 김기영 출연 김진규 <EBS> 8월12일(일) 밤 10시10분

김기영 감독은 요즘 세대에겐 ‘컬트감독’으로 통하는 인물이지만 늘 괴짜영화만 만들진 않았다. <슬픈 목가>(1960)나 <렌의 애가>처럼 정통 멜로드라마에도 손댔던 것. 아쉽게도 이 영화들은 흥행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생전에 김기영 감독은 “내 영화의 흥행률은 3할 정도다. 세편에 한편 정도는 히트작”이라고 공언한 바 있지만 히트작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중에서 <렌의 애가>는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한국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얽매어 있으면서 김기영 감독의 컬트적인 기운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영 감독은 평소 “난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다. 그냥 취미대로 놀았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렇듯 연출자의 자유분방한 개성이 온전하게 스며 있는 영화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렌의 애가>에서 김기영 감독은 자신의 전작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즉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한국 현대사와 결부시키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1937년 발간된 모윤숙의 산문을 바탕으로 했지만, 한국전쟁기로 시대적 배경을 옮겨왔다.

<렌의 애가>에서 주인공은 시몬이라는 화가다. 시몬은 가난과 자학, 그리고 손의 경련으로 더이상 붓을 잡지 못한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 쳐다볼 면목이 없다. 물건을 맡기기 위해 전당포를 찾은 시몬은 우연히 렌이라는 옛 제자를 만난다. 렌은 이미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다. 너무나 초라하게 변한 시몬의 모습을 본 렌은 정성을 다해 그를 돕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시몬은 북한군을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되고 렌과 시몬은 서로에게 강렬한 육체적 갈망을 느낀다. <렌의 애가>는 불륜드라마의 전형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남다르다. 시몬의 아내는 악처이긴커녕 남편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을 옆에서 더 안타까워한다. 배우 김지미가 연기한 캐릭터는 심지어 이런 대사마저 읊조린다. “전에 남편은 밤의 여인들을 가까이하면서 그림을 그리곤 했죠. 그뒤 수많은 걸작을 그려내곤 했답니다.” 렌도 그 못지않게 헌신적이다. 렌은 몸과 마음을 바쳐 화가를 도우려고 하는데 시몬은 렌에게 그림 모델이 될 것을 부탁한다. 화가는 모델에 대한 욕정을 억누르기가 힘들다.

<렌의 애가>에 나타나는 삼각구도, 즉 한 남자가 두 여자를 ‘공유’하면서 비극이 잉태되는 것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등에서 곧잘 발견된다. 육체적인 갈등이 인간 무의식에 관한 은유, 그리고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맞물리면서 의미심장한 기운을 품게 되는 것. 김기영 감독의 작업이 장르영화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망을 품게 되는 비결이기도 하다. <렌의 애가>는 이 밖에 강간과 매춘, 마약 등의 소재를 끌어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전쟁 시기를 가학과 피학이 공존하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멜로물의 배경으로 만들어버린다. 영화 후반으로 향하면서 <렌의 애가>는 드라마의 짜임새가 약간 허술해진다. 우연의 모티브가 지나치게 반복되면서 설득력을 잃고 있는 것. 하지만 <렌의 애가>는 유난히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시몬은 약에 취한 듯 뿌연 안개가 눈앞을 가리는 현상을 이따금씩 체험한다. 카메라 초점이 슬그머니 흐려지고 시몬은 절반 정도 넋이 나간 상태에서 그가 화폭에 담고 싶어하는 바다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김기영 감독은 이후 1970년대 걸작 <이어도>(1977)에 이르러 이같은 신화적 상징을 좀더 원숙해진 영상으로 빚어낸 바 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