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해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입니까? 제가 요즘 독할 정도로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기사를 미리 읽고 인사치레로 하는 얘기는 아닙니까? <데이지> 촬영으로 타국 네덜란드에서 두달 내내 지내는 것은 별로 쉬운 일이 아녔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몸이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다른 방도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운동을 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된 방법도 모르겠고 사실 재미도 없지 않습니까? 트레이너에게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도 자기가 좋다고 느껴야 좋은 법이라고, 운동도 그렇습니다. 이두 운동을 한다 치면 이 팔뚝 안에서 이두 근육이 벌떡벌떡 움직이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열심히, 밥 먹는 것처럼 습관이 될 때까지 운동을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옆에서 보기도 지겹다” 할 정도로 집과 헬스클럽만 오가며 살았습니다(제 마음속은 나름 되게 바빴는데 남들은 몰랐나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잡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자추처럼 반복해 움직이는 세상의 중심에 제 자신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도를 닦은 것 같다고요? 오, 그거 좋습니다!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일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 정화시키고 해독시키고 나야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느껴야 합니다. 이두 근육만이 아닌 모든 것을 말입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배우 아닙니까. 늘 특별하고 싶었습니다. 하는 것도, 입는 것도, 먹는 것도, 남들보다 특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더랍니다. 제 자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저는 제 자신이 제로인 상태에 있는 듯 느껴집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지만 그렇게밖에 표현을 못하겠습니다. 한두 가지를 해도 알찬 기분이 듭니다. 앞으로도 유지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데이지>의 혜영이도, 뭐랄까, 영화 안에서 흡수가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를 다 본 뒤에 ‘가만 있자, 누가 연기했지?’ 싶을 정도로. 욕심을 많이 부리지 않는 것이 숙제였기 때문입니다. 제게 익숙한 것들을 버려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껏 저는 여자 캐릭터가 중심인 영화, 나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호흡을 이끌어가는 영화를 해왔습니다. 그중 한 호흡이라도 내가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하게 착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데이지>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그에 대한 부담이 있었습니다. 두 남자 박의(정우성)와 정우(이성재) 사이에 놓인 여자 혜영은, 게다가 다소 평범한 캐릭터입니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경진이나 <4인용 식탁>의 연처럼 개성이 뚜렷하기보다 어디선가 많이 봐온 캐릭터입니다. 그런 역할을 내가 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결국 <데이지>는 언젠가 제 자신이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습니다.
배우라는 건 이미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지금 하는 이 일이 너무 재미있고 그 마음이 너무 크다보니, 이 일이 아니면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물을 받고 태어났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저는 스타로 키워졌습니다. 배우로서 가진 노력과 재능은 스타의 이미지 뒤에 가려 평가받을 기회도 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해온 것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제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결정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정이라 해도 그것은 신뢰이지, 내 선택이 묵살당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신뢰할 사람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저한테 모든 선택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주위의 조언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노력하고 배워야 합니다. 제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배우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존재라면, 연기란 그가 살면서 경험하고 깨닫는 것들로 자신을 덧칠해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이지>에서 제 연기가 동글동글하게 잘 빚어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아쉬움은 남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엽기적인 그녀>에 담긴, 순수하게 연기했던 모습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그런 순수함을 보여주려면 억지로 꾸며내야 합니다. 어차피 배우는 늘 아쉬움을 느껴야하는 존재입니다. 제 운명이 그렇습니다. 그저, 매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을 진실되게 반영하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완벽해 보이도록 노력하겠지만, 많이 욕심부리지 않으려고도 노력하고 싶습니다. 자만과 잡념을 버리고, 겸손과 단순함으로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내 세상의 중심인 내 자신을 지켜가면서. 제가 1981년생입니다. 갓 스물여섯되었습니다. ‘넌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지 않니’ 생각하셨습니까? 그 반대입니다. 지금이 저에게는 무엇을 시작해도 좋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