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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미를 아느뇨?
2001-08-23

컴퓨터게임/ <택틱스 오우거>

잔소리가 심한 친구가 하나 있다. 여름엔 티셔츠를 매일 갈아입어라, 밥 먹을 때 인상쓰지 말아라, 낮잠은 30분 이상 자지 마라 등등 옳은 소리만 한다(세상의 모든 잔소리들 중 옳은 얘기가 아닌 건 굉장히 드물다). 무수한 잔소리들 중 제일 자주 나오는 건 게임 얘기다.

게임 잡지나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갖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하루에도 몇개씩 쏟아져나오는 게임에다 새로 나오는 게임기와 주변 기기들, 하다못해 프로젝션 TV에 이르기까지 갖고 싶은 것들 리스트(매주 갱신한다)를 작성하다보면 한두 시간은 쉽게 간다.

대개는 리스트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지만 가끔은 사고를 친다. 주로 다른 일에서 좌절했을 때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잔소리는 각오해야 한다. 레퍼토리는 매번 똑같다. 집에 있는 게임의 반의 반의 반도 못했는데 왜 또 게임들을 사들이냐는 것이다.

<오우거 배틀 사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다. 닌텐도의 ‘슈퍼 패미컴’으로 <전설의 오우거 배틀>과 <택틱스 오우거>가 나왔고, 얼마 뒤 세가 ‘새턴’과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각각 리메이크되었다. 이 네 가지를 난 다 가지고 있다. 슈퍼패미컴용 <전설의 오우거 배틀>은 끝내긴 했지만 베스트 엔딩은 보지 못했고, <택틱스 오우거>는 하다 말았다. 새턴판으로 다시 플레이했지만 역시 끝내지 못했다. 어차피 끝내지도 못할 거 무슨 생각으로 똑같은 게임을 다른 게임기용까지 다 사들였냐고 잔소리가 대단했다.

그런데 슈퍼패미컴 후속 기종인 ‘닌텐도64’로 <오우거 배틀 64>가 나왔다. 가지고 싶었지만 하드웨어인 닌텐도64가 없었다. 게임 구매를 포기하는 게 녀석이 추구하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난 다른 접근방법을 택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슈퍼 패미컴, 새턴,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보이에 이어 닌텐도64를 또 샀다. <오우거 배틀 64>도 산 건 물론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반쯤 하다 말았다. 잔소리는 그냥 귓전으로 흘렸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휴대용 게임기인 ‘네오지오 포켓 컬러’로 <오우거 배틀 외전>이 나온 것이다. 닌텐도64야 다른 게임들도 할 게 많으니까 궁색한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네오지오에는 내가 할 만하게 딱 이거 하나였다. 게임 하나 하자고 게임기를 산다는 건 아무리 나라도 망설여졌다. 차마 신품은 못 사면서도 깨끗하게 포기는 못하고, 중고가 나오면 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그런데 예상 못한 사태가 또 한번 일어났다. 네오지오를 만들던 SNK가 게임기를 포기하고 망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게임보이 후속 기종인 ‘게임보이 어드밴스드’로 <택틱스 오우거 외전>이 출시되었다. 게임기가 12만원, 게임이 6만원선. 합쳐서 18만원이 드는데 잔소리가 아니라도 내 처지에 포기해야 마땅하다.

녀석은 내가 그걸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100가지쯤 댔다. 게임 하나 하자고 게임기까지 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지당한 말이다), 어차피 사봤자 중간에 때려칠 것이다(틀렸단 말 못한다), 이걸 사도 조만간 딴 게 또 나올 테니 ‘완전 클리어’는 어차피 틀렸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녀석은 틀렸다. 제일 중요한 걸 모르고 있다. 내가 게임을 사는 건 굳이 플레이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물론 게임하는 게 즐겁지만, 사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아서 죽을 지경이다. 왜 그걸 모를까? 왜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까? 녀석이 아무리 들볶아도 난 구매 리스트 작성과 시리즈물 짝맞추기를 계속할 것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