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프루트 챈의 `홍콩반환 3부작`
2001-08-29

홍콩, 늙은 아기

과거를 잊은 새로운 홍콩의 씁쓸한 초상

●프루트 챈의 이른바 홍콩반환 3부작- <메이드 인 홍콩>(1997),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1998), <리틀 청>(1999)- 은 홍콩의 중국반환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세 가지 방식이다. 또한 이 3부작은 언뜻 보기와는 달리 기존 홍콩영화의 전통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돼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사실 이 영화들은 부분적으로 장르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홍콩반환에 대한 불안의 정서를 징후적으로 접근- 특히 <메이드 인 홍콩>의 경우- 한다는 점에서는 평자들이 주목했던 기존의 홍콩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갱스터 장르에 리얼리즘의 시공간을 도입하려는 시도- <메이드 인 홍콩>과 <그해 불꽃놀이는…>- 도 몇몇 홍콩감독들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즉 프루트 챈은 영화적 공간을 관습적인 장르영화의 공간에 위치시키는 대신 홍콩이라는 현실적 공간을 환기시키기 위한 장치로 활용함과 동시에 이 공간에 1997년 7월1일의 홍콩반환이라는 역사적인 시간을 부여하고 있다.

<열혈남아>와 <영웅본색>의 아이들

<메이드 인 홍콩>에서 프루트 챈은 방송이 끝난 뒤 텅 빈 노이즈 화면상태로 있는 TV수상기를 프레임 안에 집어넣곤 했다. 이는 인물들을 항상 둘러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감지하려 들지 않는 홍콩의 현실상황을 암시한다. <메이드 인 홍콩>의 주인공 차우는 자살한 소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이미지를 통해 그러한 현실상황을 막연하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끝내 자신에게 다가온 불안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해 불꽃놀이는…>에서는 홍콩반환과 관련된 몇몇 보도내용들이, <리틀 청>에서는 홍콩의 유명한 배우이자 가수라는 브러더 청과 관련된 뉴스들이 TV를 채우고 있다. 이는 두 영화가 현실과 개인을 관계짓는 방식의 차이에 비춰볼 때 극히 합당한 선택이라 하겠다. 전자의 경우 주로 보여지는 것은 홍콩반환 당시 있었던 여러 공식적인 행사들- 홍콩 영국군 군대의 사열식, 주권 이양식, 불꽃놀이 등- 로서 이는 공적 역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해 불꽃놀이는…>의 주인공 가현은 그러한 현실적 사건들을 낱낱이 대면하며 그것이 자신에게 닥쳐온 불운- 홍콩의 영국군 군대 해산으로 인한 실직- 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3부작 가운데 홍콩반환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후자의 경우 브러더 청의 이야기는 리틀 청 할머니의 사적 기억으로서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또한 <리틀 청>에서 홍콩반환을 상기시키는 것은 공식적 행사들보다는 어린아이의 사적 기억에 관련된 것들- 강가에서 나누는 리틀 청과 팡의 대화, 베이징어 학습, 학교에서의 국기게양식 연습, 비자 체류기간이 만료된 본토인들의 색출작업 등- 이다. <리틀 청>에서는 이처럼 사적인 사건들이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혹은 <리틀 청>을 거시적 사건이 개개인들의 미시적 영역에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이는 성장영화들이 종종 취하곤 하는 익숙한 전략으로 그다지 새로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리틀 청>이 이러한 탐구를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다만 홍콩영화의 전통에서라면 드문 예에 속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를 공적 역사라는 좀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하기엔 영화 속 인물들은 너무 약한 존재들- 어린아이들과 노인- 이다.

프루트 챈의 3부작에서 중심인물들은 타인들에 대해 일종의 부채와도 같은 죄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반면 주변 인물들은 종종 금전적인 부채관계에 얽매여 있다). 이는 상황인식에 실패한 주인공들이 취하는 일종의 자학행위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가령, <메이드 인 홍콩>의 차우는 죽은 소녀, 핑, 그리고 아롱 모두에 대해 무언가 책임을 지려는 존재이다. 그는 영웅적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 혹은 죽음이 타인들의 죽음을 초래할 뿐이라는 식으로 결론짓고 만다. 프루트 챈은 왕가위의 <열혈남아>의 인물들을 97년 홍콩의 공간에 위치시켜놓고 왜 그들이 결국 다시 파국에 이르고 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해 불꽃놀이는…>의 가현은 자신에게 닥쳐온 불운이 일찍부터 동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한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침내 식당에서 칼싸움을 벌이던 한 소년으로부터 동생의 영상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온갖 분노를 다 쏟아붓는다. 그러나 다른 소년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다시 ‘계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 장면에서 프루트 챈이 빌려온 것은 <영웅본색>의 결말부이다. 그러나 오우삼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의 결말은 형제애는 회복불가능하며- 돈을 가지고 사라져버린 동생- 새로운 홍콩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리틀 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리틀 청은 자신의 아버지가 소녀 팡을 쌀쌀맞게 대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에게 ‘동업’을 제의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깡패 데이빗의 당뇨마저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인물이다.

<리틀 청>, 홍콩영화에 리얼리즘을 도입하다.

이상 언급된 것들을 통해 프루트 챈이 자신의 3부작을 통해 하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나를 대략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각각의 영화는 모두 조금씩 실패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을 모두 도입함으로써 ‘홍콩산’ 갱영화를 일신시킨 것으로 보이는 <메이드 인 홍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영화 속에 두 번 등장하는 소년들의 길거리 농구 장면은 각 단락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이다.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게 복수하려던 차우는 누이동생을 강간한 양부에게 복수하는 소년과 마주치게 된 뒤 생각을 바꾼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는 모양”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눈가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정녕 보산이 흘려준 눈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성장영화이다. 하지만 다음 부분에서부터 <메이드 인 홍콩>은 급작스레 청춘물의 형태로 외양을 바꾼다. 그리고 핑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청부살인을 감행하는 차우와 그의 행동으로 인해 동시에 망가져 가는 핑과 아롱의 이야기가 사뭇 MTV적인 스타일 속에서 빠르게 전개된다.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모주석의 메시지를 삽입해놓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치게 장르 깊숙이 빠져 들어가 버린 영화에 리얼한 삶의 감각을 제대로 회복시켜주기엔 역부족이 될 수밖에 없다.

<그해 불꽃놀이는…> 역시 간혹 지나치게 장르에 빠져들거나 홍콩영화의 진부한 관습들을 반복한다. 이 영화가 차용하고 있는 것은 귀향한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갱스터영화의 내러티브이다. 혹 오우삼이 만든 <첩혈가두>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많은 점에서 휴즈 형제의 <데드 프레지던트>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내러티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이야기를 흩뜨려놓는 장치들이 있다. 주인공 가현과 그의 동생 가선은 운전중 한 여자를 만나고 ‘우연히’ 다시 마주쳐 그녀의 개를 훔쳐 달아난다. 친구들과 더불어 은행을 털던 가운데 다른 은행강도 일당과 마주치게 되는데 ‘우연히도’ 그중 하나가 바로 그 여자이다. 게다가 그 여자는 ‘우연히도’ 가선의 보스 딸이다. 서극이나 황지강의 영화였다면 이러한 사실을 두고 트집 따위는 잡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인물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양상을 추적해보고자 하는 <그해 불꽃놀이는…>과 같은 영화에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인물들의 파국은 현실적 상황이 초래할 수도 있는 결과로서 이해되기보다 갱스터 장르의 비감한 결말을 향한 조작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리틀 청>은 프루트 챈의 진정 새로운 시작이다. 여기서 그가 노리는 것은 현실적 삶을 환기시키기 위한 장르영화의 쇄신이 아니라 홍콩영화에 리얼리즘의 방법론 자체를 도입하는 것이다. 깡패 데이빗의 주스에 ‘생혈차’를 집어넣는 장면이라든가 데이빗이 리틀 청과 팡의 ‘스페셜 주스’의 노예가 된다는 설정 등 - 이상하게 프루트 챈은 삼부작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로 탐폰과 배설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 <리틀 청>을 간혹 희극의 영역으로 돌려놓기는 하지만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다소 아쉬운 것은 아이와 노인의 시선으로 사적 기억의 영역을 탐색함으로써 홍콩반환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하는 시도가 성공적인 결과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환 직전 홍콩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너무 깊이 천착한 나머지 노인들의 시선과 기억마저도 아이들의 사적 기억의 영역에 포섭되고 마는 것이다. 여하간 프루트 챈이 3부작을 통해 반환 직전과 직후 홍콩의 현실을 그려내는 작업에 집요하게 매달려온 것은 사실이다.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집요함이다. 그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징후가 아닌 현실로써 홍콩반환의 문제를 되짚어볼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리틀 청>은 그러한 집요함이 마침내 장르를 벗어나 이뤄낸 귀중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프루트 챈은 이상한 방식으로 이 3부작을 원 안에 가두어놓는다. 리틀 청이 차의 문틈으로 마지막에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메이드 인 홍콩>의 세 등장인물들이다. 3부작 중 처음으로 상처를 안고서라도 반환 이후의 역사에 동참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인물인 리틀 청을 보여준 이후 갑자기 예정되었던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왜인가? 이때 차우의 얼굴에 집을 나가 갱이 된 리틀 청의 형 얼굴이 겹쳐지면서 갑자기 청의 할머니가 한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형은 날개 잘린 새처럼 이 거리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다.” 게다가 프루트 챈은 종종 반환 이전의 역사가 이후의 역사에 보태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해 불꽃놀이는…>의 가현은 비록 살아나긴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새로운 출발이긴 하나 그건 씁쓸한 것이다. 갱단 보스의 말처럼 정말 프루트 챈은 홍콩을 ‘늙은 아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