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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2001-08-29

인식론적 스릴러 <메멘토>

● <메멘토>는 낯선 침대 속, 낯선 사람 옆에서 잠이 깰 때 느낄 법한 그런 매력적이고 전율스런 감정을 불어넣는 영화다. 부분적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정신여행과 같은 느낌을 주고 또 부분적으로는 수많은 플래시백들이 거꾸로 나열되며 오버랩되는 <포인트 블랭크>를 보는 듯도 하다. 비디오가게들은 ‘복고풍 누아르’와 ‘신세대 누아르’로 가득 차 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 담대한 시간 뒤틀기는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이것을 ‘누아르를 넘어선 누아르’라고 부르도록 하자.

해럴드 파인터의 <배신>이나 마틴 에이미스의 <시간 화살>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강은, 10분이라는 시간 단위로 시퀀스마다 거꾸로 흐른다. <메멘토>는 살인과 함께 시작하여 그 살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사건들이 결국 이 살인으로 이어진 것인지를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을 보기까지, 영화는 계속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각각의 플래시백은 다른 플래시백의 머리와 꼬리를 잇는다. 이 요술트릭은 관객을 조금도 한눈 팔지 못하게 만드는 구실을 하지만, 내러티브는 이것 외에도 또다른 수수께끼를 준비하고 있다. 관객의 기억과 추리에 의존하여, 영화는 살해된 아내로 인해 정신적 내상을 입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주인공을 그려낸다. 각각의 신은 아무것도 기억못하고 ‘결백한’ 레너드(가이 피어스)가 각각의 미스터리까지 어떻게 도달하게 됐는가를 풀어야 하는 과제를 내준다.

레너드는 <도망자>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아내의 살인범을 뒤쫓는 전 보험수사관이다. 그는 누군가를 쫓는 중에 갑자기 제정신이 들면서, 지금 누가 누구를 쐈으며 왜 쫓고 있는 건지를 새삼스럽게 자문하는 사람이다. 그는 옷장 속에 갇힌 한 사내를 발견하고는 그의 모텔 방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추리해내야 한다(그렇다면, 그는 대체 몇개나 되는 방을 빌린 것일까?) 레너드는 나탈리(캐리 앤 모스)를 주시한다. 그녀와 약속을 잡아놓은 것 같은데, 대체 용건이 뭐였는지를 기억못해 궁금해하면서. 그녀는 그가 테디(조 판톨리아노)를 죽이게끔 일을 꾸민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그럴 참인가?

레너드라는 캐릭터는 보기에 불쌍할 정도로 카메라 기술에 의존해 있다. 그는 여러 번, 때론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다친 뒤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수가 없어.” 누구라도 만나기만 하면, 그는 재빨리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설명을 써둔다.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중요한 정보들을 메모하기 위해 펜을 찾기 힘들면, 대단히 신뢰성 없는 이 화자는 자기 몸에 직접 써놓기도 한다. 그의 주머니는 설명이 달린 사진들로 가득하고 그의 손은 각종 주소들로 빈틈없지만, 가장 치명적인 단서들은 몸에, 거울에 비춰봐야 할 뒤집힌 상태로, 문신으로 새겨넣는다. “존 G가 네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했다.

<메멘토>를 보는 것은 어디 비할 데 없이 예외적이고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밀도있고 긴장되며 비위상하고, 사람을 온전히 빨아들인다. 또 가이 피어스는 조심스럽고 흉포하게 이 작품 속에 완전히 뿌리내린 것으로 보인다.

놀란이 스물아홉살 때 내놓은 위험한 첫 장편 (1999)에 다양한 층위의 영역과 대단한 자신감을 더해놓은 <메멘토>는 어쩌면 곡예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대단히 철학적인 곡예다. 이 작품은 절망의 힘을 다각적으로 망라했고 영화라는 매체의 전체주의적인 일방적 서술진행에 대해 괴팍하게 발언했으며, 결과적으로 왜 집집마다 DVD 플레이어를 장만해야 하는지를 선전한 셈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과연 알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거의 진지할 정도의 수준으로 제기하는 인식론적 스릴러다. 영화 전체를 통해 레너드는 기억보다 사실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며 용감할 정도로 실용주의적인 자세로, 인간의 주관성에 반기를 드는 주장을 제기한다. “나는 내 정신 바깥의 한 세계를 믿어야 한다. 나는 나의 행동이 의미를 갖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설령 내가 그것들을 기억 못한다 할지라도.”

이 영화의 마지막 트릭은 관객의 이와 유사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등장한다. <메멘토>는 (순환적인) 뫼비우스의 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고무딱총처럼 당신을 낚아채 일직선상의 시간 세계로 메다꽂는다. “어? 아니, 지금 내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지금껏 만들어진 모든 영화들의 가장 핵심적인 물음 아니던가.(<빌리지보이스> 2001. 3. 12)

짐 호버먼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