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9·11 테러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테러가 얼마나 큰 공포로 다가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TV 속 화면에 놀람을 금하지 못했고, 그 놀람과 공포는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졌다. 2004년 러시아에서 제작된 <러시안 묵시록>은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다. 모스크바 시민들을 상대로 테러를 일삼는 체첸 반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러시아의 소령 알렉세이 스몰린(알렉세이 마카로프)은 군사 첩보 도중 체첸의 포로로 붙잡힌다. 심한 고문을 당하던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해 러시아 정부가 모스크바 테러에 관여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고, 러시아 정부는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한편 체첸은 이슬람의 테러 세력인 안사르 알과 또 한번 테러를 계획하고 러시아의 서커스 극장을 습격한다. 조국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에게도 돌아가지 못하는 알렉세이 소령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결백과 러시아 시민들의 목숨을 모두 구하려 나선다.
알렉세이 가르킨 소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러시안 묵시록>은 체첸과 러시아, 체첸과 서구유럽사회의 갈등을 토대로 한다. 극중에 등장하는 각국 지도자들도 조지 부시부터 블라디미르 푸틴까지 현실의 인물을 연상시키는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러시안 묵시록>이 바라보는 테러가 현실적이진 않다. 영화는 사람들이 9·11 테러를 보고 느꼈던 가장 말초적이고 1차적인 공포감과 스펙터클에만 주목한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폭파되고 끊임없는 총격전이 오가지만, 이를 둘러싼 인물들의 감정 상태는 잘 표현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허점도 눈에 띈다. 알렉세이 소령이 마지막 비행기에 어떻게 탑승했느냐는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그와 가족 사이의 비애는 아주 간략하게만 소개된다.
2004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해 역대 러시아 최고 흥행작이 된 <러시안 묵시록>은 러시아 버전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액션영화의 논리에 밀려 체첸과의 분쟁이라는 풍부한 역사적 텍스트를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