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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의 <어머니와 아들>
2001-09-06

마약 같은 영상의 향연

Mother and Son 1997년, 감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출연 거드런 게이어 9월8일(토) 밤 10시10분

이따금 ‘이 영화를 어떻게 글로 설명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바로 그렇다. 직접 눈으로 보라는 설명이 최상일 듯싶은 영화. 플롯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배우도 단 두명만 출연할 따름이다. 그런데도 영화엔 시적인 서정과 중독성이 배어 있다.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을 빌리자면, “소쿠로프의 작품엔 한번 영화를 보면 도중에 포기할 수 없는 마약 같은 효과가 있다. 일본에서도 그의 영화가 상영될 기회가 있었는데, 소쿠로프 영화가 상영될 때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기묘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의 영화는 어느덧 무서운 ‘습관’이 되어버린 거다.”

러시아 출신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에게 <어머니와 아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각종 영화제를 통해 그의 명성을 해외로 전한 작품이자, 이른바 ‘초월적’ 스타일로 분류되는 감독의 영화세계를 확립한 작업인 것이다. 소쿠로프는 러시아문학의 철학적 지성과 신비주의를 스크린으로 불러들인 감독으로 평가받곤 한다. 죽음의 문제, 그리고 영혼의 안식을 한결같이 논하면서 수공업적 방식으로 아름다운 영상을 창조하는 데 달인이다.

<어머니와 아들>에서 소쿠로프 감독은 전작인 <세컨드 서클>(1990)의 흔적을 남겨놓는다. 어느 부자가 등장하는 <세컨드 서클>이 병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과정, 그리고 혼자 남은 아들이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죽음을 피부로 체험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놓았다면, <어머니와 아들>에선 어머니가 세상에 작별을 고한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그녀를 돌보는 아들이 있다. 어머니는 걷는 것도, 먹는 것도 힘이 들 정도로 허약한 상태다. 어머니가 산책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아들은 그녀를 안고 길을 나선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이별의 시간이 금세 찾아온다.

<어머니와 아들>은 풍성한 영화다. 이미지가 풍성하고, 들릴 듯 말 듯하면서 끊이질 않는 사운드가 풍요롭다. 명징하기 이를 데 없는 화면은 <어머니와 아들>이 세트가 아닌 실외에서 촬영한 영화인지 믿기 힘들 지경이다. 미니어처를 사용한 것 같은 착시현상이 느껴지곤 한다. 영화에서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자신을 돌보는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두 사람은 집을 벗어나 들판으로 향한다. 바람이 불어오고, 어머니를 품에 안은 아들은 걸음을 멈칫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소쿠로프 감독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화면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간다. 고요하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바람결에 파도처럼 흔들리는 풀잎들, 그리고 사람의 작은 숨소리까지 영화에선 큰 울림을 낳는다. 세심한 디테일을 통해 영화는 차츰 묵직한 주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간다는 것, 그것은 허전하지만 참아내야만 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거다. 감독과 곧잘 비교대상이 되곤 하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조형미와 종교적 주제를 영화에 각인시켰다면, 소쿠로프 감독은 작은 일상의 흐름 속에 찾아드는 ‘신비의 순간’을 화면에 옮긴다. 피곤에 지친 어머니가 세상에 안녕을 고할 때, 작은 나비가 그녀의 손가에 머물러 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나의 생명이 별이 스쳐가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원히. 지극히 자연스럽게.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