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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기사 윌리엄>
2001-09-06

유쾌한 시대착오

중세기사인 주인공 윌리엄이 경쟁자 아데마르와 첫 번째 대결을 할 때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I Want to Take You Higher>가 울려퍼진다. 알다시피 이 노래는 가장 훌륭하게 펑키한 흑인음악 정신을 구현한 히피시대의 대표작이다. 슬라이 스톤은 캘리포니아 출신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건달이다. 유명한 <롤링스톤> 인터뷰에서 그는 철저한 약돌이로 묘사되어 있다. 그를 인터뷰하러 간 <롤링스톤> 기자가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 동안 (약 때리느라고) 나오지 않는 슬라이 스톤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인터뷰의 초반을 구성한다. 어쨌거나 그 건달은 히피시대에 전무후무한 음악적 화합의 그루브를 이루어냈다. 그의 밴드에는 백인들도 있다. 그 백인들과 흑인들이 함께 ‘높은 경지’의 그루브로 날아가는 장면을 우리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감동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바로 그런 슬라이 스톤이 중세기사 윌리엄이 경쟁자와 숨막히는 대결을 하는 순간 불러내어진다. 그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신나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게 볼 부분은 딱 그거 하나다. 시대착오. 도박광으로 묘사되어 등장하는, 중세의 위대한 시인 초서는 마치 복싱 중계의 앞부분을 흥분섞인 목소리로 장식하는 ‘링아나운서’와 동일시된다. 또 보자. 주인공 윌리엄이 사랑하는 여자 조슬린과 춤을 춘다. 처음에는 ‘겔더랜드’의 민속춤으로 명명되었던 그 춤은 점차 록음악을 배경으로 하면서 70년대의 고고로 변하고 만다. 더 보자. 윌리엄이 십여년의 객지생활을 끝내고 영국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씬 리지의 <Boys Are Back in Town>이 울려퍼진다. 아니, 이런 장면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팬들에게 이 영화가 그런 방식의 시대착오를 유쾌함을 유발하는 기본적인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노래들이 있다. 바로 퀸의 노래다.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엄이 두 번째 펼쳐진 아데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다음, 흐르는 엔딩 타이틀은 퀸의 <We Are the Champion>이다. 그 다음에 자막이 넘어가면서는 AC/DC의 <You Shook Me All Night Long>이 흐른다. 이건 완전히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연결관계다. 도대체 중세기사이 이야기와 AC/DC의 하드록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관계가 있다. 바로 ‘관객’이 문제이다. 음악은 이야기 자체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작용한다. 이 영화의 포인트도 거기에 있다. 이야기 자체의 감동적인 전개를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보다는 그 이야기를 구경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재구성하여 흥미를 유발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앞선다. 이 영화는 그런 의도를 전면에 내세워 보인다는 것이 특징적이긴 하지만, 실은 옛날 이야기를 보여주는 관점 자체가 사실상 늘 그런 식이다. 그것은 <왕건>에서나 <여인천하>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그 옛날 이야기가 당대의 관객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것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고민거리이다.

그런 방식으로 이 영화는 이야기의 초점을 흐리고 있다. 중세기사 윌리엄이 신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연한 의지로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인지, 아니면 그 과정을 통해 현대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을 그리려고 한 영화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바로 그 ‘알 수 없음’이 이 영화의 유쾌함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관객에게 유쾌함을 주고 있다. 중세 이야기가 우리에게 얼마만큼 깊은 의미를 지니는지 따지기 이전에 그 유쾌함은 우리에게 작용한다. 기사는 스포츠맨이 되고 그 기사가 사랑하는/기사를 사랑하는 여인은 그루피가 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은연중 초서가 누군지 알게 된다. 문학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가장 서글픈 한 방법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