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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 촬영감독 3인이 말하는 촬영의 매력 [1]
오정연 사진 이혜정 2006-08-17

낯선 얼굴, 낯선 이름에 어리둥절할 수도 있겠다. 아마도 자신이 찍은 영화의 제목과 감독이 알려지고, 손수 만들어낸 화면에 관객이 열광한다면 그것으로 족할 만한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카메라 ‘뒤에’ 서는 사람들이다. 충무로에서 촬영감독 데뷔를 꿈구는 이들은 미처 데뷔작을 만들기도 전에, 단편영화 팬들 사이에서 약간의 이름을 알렸다. <즐거운 우리집>과 <나의 지구를 지켜줘>와 <내츄럴 보이즈>라는 연출작과 <핑거프린트>와 <인플루엔자>와 <가희와 BH>라는 촬영작 덕분이다. 영상원과 같은 영화학교에서 촬영 전공자가 연출작을 만드는 것이 그리 놀랍고 희귀한 일은 아니지만, 이들의 연출작은 웬만한 감독지망생의 그것보다 흥미롭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들의 카메라가 온전히 연출의 마음을 담기 위해 남다르게 노력한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연출의 마음을 담는 카메라.

엄혜정, 김병정, 백윤석. 가장 긴밀하게 감독과 소통해야 할 촬영감독으로서 중요한 덕목을 한차례 검증받은 세 사람을 만나, 촬영과 연출을 둘러싼 절절한 애정을 확인했다. 지아장커의 작품을 촬영하는 중간 <명일천애> <천상인간> 등의 연출작을 만든 유릭와이 혹은 <무간도> 시리즈를 연출하기 전까지는 <열혈남아>를 비롯한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더 유명했던 유위강을 꿈꾸는 이들은 그러나 자신의 연출하는 영화마다 카메라를 잡는 스티븐 소더버그와는 다른 길을 걷고 싶어하는 주인공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푸는 것보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의 어려움과 매력 또한 경험한 바 있는, 그야말로 다재다능. 충무로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몇 가지의 명백한 이유 중 하나다.

테마1: 좋은 촬영, 이런 게 아닐까?

“실제로 대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예쁜 배우가 서 있어도 화면에는 못생기게 나온다.” -엄혜정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감독이 집착하는 지문의 행간을 이해하면 영화의 맥락이 나온다. 그걸 발견하는 게 진짜 재미다.” -김병정 “<그 남자 거기 없었다>의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은 흑백을 어떻게 찍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왜 흑백을 선택했는지 인문학적 배경을 길게 설명한다. 기술은 기본이고, 그 나머지가 더 중요하다.” -백윤석

짐작하다시피, 촬영감독이 감독과 맺는 관계는 여느 스탭과 감독보다 중요하다. 투수와 포수처럼, 그들의 조합이 부부에 비교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병정씨를 처음 본 것은 영상원 전문사 실습작품 촬영현장이었다. 촬영감독은 물론 정식 스탭도 아닌 그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홍반장’ 같았다. 작은 체구의 그는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그로부터 3년. 충무로에 뛰어들어 촬영감독의 꿈을 키우는 그는 엄한 아버지처럼, 편한 어머니처럼 친구 같은 형과 깐깐한 언니처럼 “현장에서 의지가 될 수 있는 촬영감독”을 꿈꾼다고 한다.

그리고 엄혜정씨는 촬영감독은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보다 타인의 무의식을 읽어내는 데 익숙해야 한다고 믿는다. 2004년 촬영작(<핑거프린트>)과 연출작(<즐거운 우리집>)이 국내외 영화제에서 연일 수상 소식을 전하면서 ‘업계’에 이름을 알렸던 그는 “감독이 촬영감독을 더 사랑하는 경우는 없다”는 애틋한 말로 이를 정리한다. 이미지를 말로 설명하는 것을 꺼리는 감독이 “걸어잠근 마음의 문을 하나씩 열어나가야 한다”는 엄혜정씨는 시나리오 회의는 물론, 술자리 같은 사적인 기회, 혹은 문득 감독의 뒷모습을 보다가도 “저거였나” 싶은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고 말한다. 시나리오에 미처 표현되지 않은 감춰진 맥락을 비주얼로 풀어내는 것, 혹은 시나리오를 가장 완벽하게 숙지한 감독의 눈으로 영화를 대하는 것. 과연, 좋은 촬영감독의 덕목은 좋은 연인의 덕목과 많이 겹친다.

한편 <가희와 BH>는 영화를 만든 감독의 내면을 궁금하게 만든다. 한 걸음 나아가, 무성영화 같기도 하고 모던한 유럽영화 같기도 한 비주얼과 편집을 주시하다보면 이번엔 촬영감독이 희한한 영화와 희한한 감독을 어떻게 이해하고 카메라를 들었을까 궁금해진다.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나리오가 말해주지 못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같이 작업하는 연출과는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백윤석씨는 <가희와 BH>의 신동석 감독과 4편의 촬영작 중 두편을 함께했다. 그는 남자주인공이 ‘병화’라는 이름 대신 BH라는 이니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애초에 병화는 영화 속에서 실제로 여자주인공을 만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며 촬영했다고 말한다. 알쏭달쏭한 선문답을 예사로 던지는 그는 정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질문을 고민하는 것에 익숙하다. 차갑고 단순한 기계인 카메라에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담는 것이 촬영감독의 몫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테마2: 연출 경험, 이런 게 달라지더라.

“감독이 배우랑 리허설하는 순간에 어떤 감정이 오가는지 보기 위해 집중하게 된다.” -엄혜정 “배우를 사물이 아니라 감정이 있는 생명으로 보게 된다.” -백윤석 “연출의 언어와 촬영의 언어 사이에 통역이 가능해진다.” -김병정

영화학교에서 촬영 전공자가 연출작을 만드는 것은 대부분, 커리큘럼상 실습작이 나와야 하는데 연출 전공자가 없기 때문이다. 엄혜정씨가 <핑거프린트>를 만든 것도 그랬다. 김병정, 백윤석씨와 마찬가지로, 연출과 촬영을 병행하는 것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지라 카메라는 다른 친구에게 넘겼다. 그런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순간은 “배우 연기에 여념이 없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힘들어하는 스탭의 얼굴을 보았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은 물론, “식사 시간에 행복하게 밥을 먹는 스탭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스탭 계약서를 써보는 연습”도 해봤다. 그는 스탭들이 촬영 시작과 동시에 촬영 종료를 기다리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스탭이 현장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촬영을 전공하면서도 1년에 한편씩 연출작을 만들어온 백윤석씨는 연출자의 남모를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네츄럴 보이즈>를 찍을 무렵보다 시나리오를 쓸 때가 더 힘들었던 그는, 연출자로서 “내가 왜 이 얘기를 해야 하지? 안 해도 되는데, 왜 그랬을까?”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그것만 해결되면 그 뒤는 다 좋았다. 그러한 경험은, 시나리오를 통해 감독의 욕망을 역추적하는 데 도움이 되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감독과 콘티를 논의할 때 늘 이야기를 중심에 놓게 됐고, 그저 피사체처럼 배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존중하는 버릇도 생겼다.

김병정

사실 촬영과 연출의 경험을 대등하게 가진 촬영감독은 두 종류의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쟁력을 지닌 셈이다. “50mm 렌즈를 85mm로 바꾸어서 타이트하게 프레이밍하다”와 “배경과 캐릭터의 관계보다 인물 자체에 집중하다”는 현장에서 결국 같은 의미. 전자가 촬영의 언어라면 후자는 연출의 언어다. 복잡하고 혹독했던 <구타유발자들>의 현장에서 두 언어를 구사하던 B캠기사 김병정씨는 B카메라가 필요없을 땐 영락없는 연출부였다. 그는 감독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촬영적으로 연기를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을 배우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눈이 돋보이는 조명을 해도 배우가 우는 연기를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도리가 없다. 그때는 ‘울면서 한번 고개를 들어주세요’보다는 ‘울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들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둘 중 어떤 말이 더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낼 것인지는 뻔한 일이다.

짧은 시간에 수만 가지 결정을 계속해서 내려야 하는 연출의 고독함을 이해하는 세 사람이기에 돌이켜보면 연출자에게 미안한 순간도 많다. 독특한 배경이 필요한 영화를 찍기 위해 헌팅한 곳이 장맛비에 갯벌로 변해버린 뒤에도 촬영을 강행했던 무리한 결정(김병정), 발전차의 연료를 계산하지 못해 중요한 장면의 촬영을 앞두고 불이 나가버린 실수(백윤석), <나는 날아가고… 너는 마법에 걸렸으니까>를 찍을 무렵 자연스러운 미장센을 위해 골목길 쓰레기봉투를 프레임 안에 집어넣는 김영남 감독에게 “위험한 곳은 괜찮지만 지저분한 건 싫다”고 맞서며 쓰레기봉투를 기어코 빼겠다 고집을 부렸던 일화(엄혜정) 등이 그런 기억들. 지나고 나면 사소해도 당시엔 아찔했던 순간, 그들의 미안함은 진심이다. 다른 입장에 서본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다.

김병정

-1972년생, 영상원 99학번. <빈 집> <> <특별시 사람들> 등 촬영부, <구타유발자들> B캠기사 -기계설계를 전공해 직장을 다니다가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년에 7, 8편씩 촬영하는 일중독과 기계만 등장하는 연출작을 찍을 정도의 기계 사랑 정신은 촬영이라는 포지션과 잘 어울린다. 재학 시절 촬영작의 연출 집을 전전하며 꼬리를 무는 프로젝트에 몸을 던졌고, 늘 장비와 함께 이 연출에서 저 연출로 인수인계되며 영화·연출과 연애하듯 지낸 탓에 정작 본인은 연애를 제대로 하는 것인지 주변에서 걱정이 많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일명 ‘친절한 병정씨’.

김병정의 ‘나의 지구를 지켜줘 vs 인플루엔자’

<나의 지구를 지켜줘> -미쟝센단편영화제 액션스릴러 부문 최우수 작품상 수상, 쇼트쇼츠단편영화제, 광주국제영화제 등 상영 -납치된 여고생의 제보를 받고 이를 수사하는 형사의 망상과 착각을 기억의 재구성으로 풀어나갔다. 촬영전공 전문사 과정 졸업작품. 전문사 동기 중 연출이 졸업을 앞두고 몽땅 휴학해버렸고, 촬영작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졸업을 1년 늦추기보다는 독립단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색다른 단편영화를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제작했다. -그외 연출작: <굿모닝> 등

<인플루엔자>(연출 봉준호)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5년에 걸친 한 인물의 변화를 캠코더, CCTV 등 일상 속에 널린 이미지로 보여주고,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영화. 고정된 CCTV의 시점, 좋지 않은 화질의 화면으로 구성되기에 고전적인 의미의 촬영감독이 아니라 각종 장비를 능숙하게 관리하면서 적재적소에 설치·사용하는 촬영감독이 필요했다. -그외 촬영작: <그해 아폴로 11호는 달에 갔을까>(이스트만 장학프로그램 촬영부문 수상), <원하는 대로>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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