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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잔소리꾼 할머니
2001-09-12

영화평론의 전범 보여준 폴린 카엘 별세

면도날 같은 평문으로 많은 영화인을 피흘리게 하고, 월계관 같은 찬사로 또다른 영화인들을 명예의 전당에 앉혔던 영화평론계의 ‘빅 마마’ 폴린 카엘이 지난 9월4일 82살로 숨을 거뒀다. 사인은 지병인 파킨슨병. 세 차례 결혼하고 이혼했던 그녀의 유족으로는 딸 지나가 남았다. 1968년부터 1991년까지 23년간 기고한 <뉴요커>의 영화평들로 가장 높은 필명을 휘날린 그녀의 저서로는 <영화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1965), <키스 키스 뱅 뱅>(1968), <고잉 스테디>(1970), <영화 속으로 더 깊이>(1973) 등의 에세이와 리뷰 모음집이 있다.

<뉴요커>와 그 이름을 뗄 수 없는 폴린 카엘의 고향은 캘리포니아. 아버지의 영향 아래 영화광이자 독서광으로 성장한 그녀는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서 철학을 배웠으나 중도하차했고 로스쿨을 지망했지만 시인 등 예술가 패거리와 어울리면서 법에 관한 흥미를 등졌다. 극작, 실험영화 연출, 극장 매니저를 비롯한 직업을 전전하던 카엘은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영화 동호회 팸플릿과 소규모 매체를 중심으로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후일 자그마한 몸집과 집요한 스타일로 ‘테리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그녀의 독한 글은 떡잎부터 범상치 않아서 카엘의 일반 잡지 기고활동은 당대의 블록버스터 <사운드 오브 뮤직>을 ‘사운드 오브 머니’라고 짓씹은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폴린 카엘은 비평적 객관성이라는 말의 공허함을 경멸했고 독립된 글로서 영화평이 가지는 완결성과 필자의 개성, 영화가 필자 자신의 생활과 공적인 삶에 파고드는 방식을 드러내는 일을 중요히 여겼다. <뉴요커>와의 길고 의미심장한 인연을 시작한 카엘의 첫 평문은 <보니와 클라이드>에 대한 호평. 편집자가 당초 집필의 자유를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열광과 혐오, 편견을 전혀 감추려 들지 않는 그녀의 스타일은 곧 편집진의 논란과 가필을 야기했다. “쓰는 것보다 내가 원래 쓴 것을 복구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는 것이 폴린 카엘의 회고.

카엘의 평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는 “한 예술의 얼굴을 바꿔놓았다”고 단언하는가 하면 상업적 속셈이 뻔한 소모품이나 예술품을 가장한 허위의식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사형선고를 서슴지 않고 내렸다.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도 그녀의 법정에서는 유죄였다. 그런가 하면 ‘레이징 케인’이라는 제목의 글은 <시민케인>의 작가적 권위가 오슨 웰스가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 허먼 J. 멘키위츠에게 있다고 주장해 결국 카엘의 패배로 돌아간 길고 뜨거운 논쟁에 불을 당기기도 했다. 자연히 그녀에겐 원수도 신도도 많았다. <스타더스트 메모리>의 우디 앨런, <레즈>의 워런 비티, 스탠리 큐브릭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카엘의 펜에 만신창이가 됐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스티븐 스필버그, 로버트 알트먼, 브라이언 드 팔마는 카엘의 낙점을 받아 발돋움했다. 어떤 할리우드 프로듀서도 카엘이 칭찬한 감독을 무시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그녀의 글을 추종하는 ‘카엘라이트’라 불리는 평론가 집단까지 등장했다. 폴린 카엘의 영화관과 평론 태도를 공유하는 이 주니어들의 존재가 그녀의 보이지 않는 권력을 더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말년에는 “칭찬에도 욕에도 부주의한 과잉이 있었다. 영화에 대한 체험을 간추리는 과정에서 내가 쓴 말에 스스로 휘말려 너무 많이 나아가기도 했다”고 반성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이미 그녀의 평이 한 세대의 평론가들의 의식 속에 하나의 선명한 전범을 새긴 다음이었다. 1980년대 들어 폴린 카엘의 글은 조금씩 예리함을 잃어간다는 평을 들었다. 그녀도, 거대 예산 블록버스터에 명줄을 내맡긴 할리우드도 늙어가고 있었다. 신나게 공격하고 신나게 떠받들 대상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전의를 상실했던 것일까? 은퇴 뒤 3년이 지난 1994년 카엘은 “현재의 영화평은 진공에 대한 리포트일 때가 잦다”고 푸념했다. 거대한 진공을 두고 눈을 감았던 폴린 카엘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잔소리는 무엇이었을까.

김혜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