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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2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B급 좌파>. 얼마 전, 3년 넘게 여기에 써온 칼럼들을 묶어 낸 책이다. 재생지로 만들어 ‘짚단처럼 가벼운’ 책 앞머리에 나는 주홍글씨로 적었다. “양산리 한신을 추억하며. 故 이계숙 누이에게. 서정오 유재영에게.” 이계숙, 서정오, 유재영. 정처없던 내 십대의 기착지, 한신에서 만나 20여년 동안 늘 함께한 내 소중한 벗들, 내 정신의 일부들.

이계숙 누이는 나보다 한 학번 아래에 나이는 여섯살 많았다. 3년 전 그가 내게 “늑막에서 물을 뺐는데 암 세포가 나왔대” 하고 남의 일처럼 암 발병을 알릴 때 이미 폐암 말기였음을 나는 그가 죽기 며칠 전에야 알았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암이 치명적인 상태라고 말하지 않은 채 혼자 암과 싸우다 갔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는 남이 들어 즐거운 일이 아니고선 자신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대화란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는 일이었다(대개의 사람들에게 대화란 ‘자기가 말할 순서를 기다리는 일’이다). 사는 게 팍팍해서 불쑥 그를 찾으면 그는 언제나 반가운 얼굴로 차와 먹을 것을 내오곤 했다. 이제 내가 그를 찾을 수 없게 되니 그가 대신 나를 찾는다. 늦은 밤 혼자 노트북을 두드리다 인기척에 뒤돌아보면 그가 내 뒤에 빙그레 웃고 서 있다. 그는 언제나처럼 말한다. “아, 우리 규항이가 애쓰는구나.”

서정오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감옥에 다녀온 선배려니 했다. 얼마 뒤 나와 동갑내기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의 만만치 않은 지적 축적은 처음부터 머리가 빈 건달인 나를 압도했다. 이를테면, 결론을 내리기 곤란한 얘기를 맺을 때면 그는 “자궁으로 돌아가버린 거지”하며 씩 웃곤 했는데 그게 최인훈의 <광장> 이야기라는 걸 나는 2학년이 되어서야 알아챘다. 학보사 기자 노릇을 열심히 하던 그는 편집장 임명을 며칠 앞두고 말없이 학교를 떠났고 제대 뒤엔 공장에 들어갔다.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이제 노동자다. 그 시절 지적으로 나를 압도했던 그는 이제 삶의 축적으로 나를 압도한다. 몇번이나 거덜이 났지만, 여전히 그에게 사적 소유 개념이란 가소로운 것일 뿐이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양보다 사회주의를 사는 양이 압도적인 그는, 사회주의를 사는 양보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양이 압도적인 나의 든든한 은신처다.

고등학교 시절 태극기와 성서를 안고 교실에서 자곤 했다는 ‘애국적’ 이력을 가진 유재영은 학내 언더서클에서 가장 착실하게 성장한 우리의 이론가였다. 서정오와 나는 그런 그를 ‘유교수’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그가 생산한 한국 자본주의 분석문들을 즐겁게 읽곤 했다. 서정오가 압도적인 사회주의자이듯 유재영은 압도적인 선비(였)다. 서른 즈음 어느날 같은 공간에서 일하던 우리는 딱 한번 심하게 언쟁했다. 격앙된 목소리가 최고조에 이른 어느 순간 그가 갑자기 표정을 풀며 말했다. “형이 맞네 뭐. 내가 잘못 생각했어. 사과할게.” 그뒤 누구에게서도 그런 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의 위엄을 배웠고 삶 속에서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 내가 남을 욕하는 일을 업으로 삼다시피 하면서도(좋은 말로, ‘비판적 지식인 노릇’이라 하던가) 그나마 염치를 유지하고 있다면 대개 그 순간 덕일 것이다. 건강이 안 좋은 그는 오늘 미아리께서 가게를 하고 있다.

죽은 이계숙 누이, 노동자 서정오, 가게를 하는 유재영. 그들은 절대 넘어지지 않는 삼발이의 발들처럼 늘 나를 둘러 지지한다. <B급 좌파> 낸 일로 전화를 걸어온 서정오에게 내가 말했다. “정오나 재영이가 내 선생들인데, 내가 이러고 사니 뭐가 뒤바뀌었지 뭐야.” 그가 말한다. “아니야. 항이가 하는 덕에 우리는 이렇게 편하게 살잖아.” 서정오는 내가 보내준 <B급 좌파> 열부 값을 다음날 내 통장에 입금해 놓았다. 유재영에겐 아직 책을 전해주지 못했다. 아, 계숙 누이에게도. “누이, 어서 와 책 가져가요.”

김규항/출판인 gyuha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