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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경고
2001-09-13

SK텔레콤의 스카이 CF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또 인간에게 상처주는 일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신사적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 같다. 무슨 납량특집도 아닌데 서늘한 이야기로 서두를 연 연유는 순전히 SK텔레텍의 휴대폰브랜드인 스카이(SKY) CF의 잔상에서 비롯했다.

흔히 CF로 불리는 TV-CM은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자리를 잡아 시청자의 눈에 들기 위해 다채로운 ‘쇼’를 벌인다. 시간 제한이 엄격하고 무수한 경쟁자가 앞뒤에 포진해 있는 악조건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CF는 치열한 몸부림을 친다. 그들의 처절한 몸짓에도 불구하고 광고를 마주 대하는 시청자의 태도는 100% 자유롭다. 보기 싫으면 안 봐도 그만이며, ‘놀고 있네’라고 비아냥거려도, 심한 욕을 퍼부어도 상관없다. 하다못해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쟤, 예쁘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광고 속 인물을 불량하게 지칭해도 무방하다.

직업상 방송프로그램 못지않게 광고를 챙겨보곤 하지만 TV수상기 앞의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 ‘릴랙스’ 그 자체다. 모든 감각의 촉수를 최대한 둔감하게 늘어뜨린 채 광고의 ‘쇼쇼쇼!’를 감상한다. 그런데도 눈이건 귀이건 가슴이건, 어느 신체부위가 반응을 보인다면 일단 그 자극의 주체는 주목할 가치가 있음을 증명했다고 판단한다.

그런 점에서 스카이 CF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반응은 3단계로 이뤄졌다. 먼저 신제품이 나왔다는 정보를 취득했고, 다음엔 신제품의 기능이 개인적으로 얼마만큼 필요한가를 점검했으며, 마지막으로 광고의 발상에 매력과 두려움을 맛보았다.

한 여자(레베카라는 호주국적의 모델)가 상반신을 맞댄 채 남자와 진하게 포옹하고 있다. 왼팔은 남자의 목덜미를 감싸안고, 나머지 오른팔은 남자의 등 뒤로 쭉 뻗은 상태다. 오른손엔 휴대폰이 들려 있다. 폴더형 휴대폰의 뚜껑을 연 채 화면을 보고 있는 여자. 남자와 애정행위를 나누는 가운데서도 어디에선가 걸려온 전화를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게 아니다. 그는 휴대폰의 화면에 자화상을 비추고 있다. 카메라를 장착한 휴대폰으로 남자를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화상메일로 누군가에게 전송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메시지도 곁들였다. ‘잘 봐, 네 자리에 누가 있는지….’ 메일의 수신자는 광고 속 여성을 배신한 옛 애인이거나 싫증이 나 관계를 청산하고 싶은 여성의 현재 애인임을 눈치챌 수 있다.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이 탄생했다는 광고의 일차적인 정보가 먼저 호기심을 발동한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이동통신 단말기의 세계에 감탄사를 내뱉는다. ‘사진촬영, 즉석현상, 전송까지 논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는 휴대폰마저 나오다니, 참 좋은 세상이야’라고.

스카이 광고와 재회했을 때에는 과연 그러한 기능이 사용가치가 있을 것인가를 따져보았다. 즉각적인 대답은 ‘No’. 사진촬영을 싫어할 뿐 아니라 통화하면서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화상전화기 시대의 도래도 은근히 걱정스럽다. 따라서 광고의 설정처럼 자화상을 사진에 담는 행위는 남의 나라 얘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소중한 순간을 영상으로 채록해 휴대폰에 저장할 수 있다는 점은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많은 이에게 흥미로운 장점일 수 있다.

광고와 재차 만나면서 내용의 발칙함에 관심이 쏠린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지만 광고의 주인공은 첨단 휴대폰을 활용해 복수극 혹은 결별식을 치르고 있다. 메일을 받는 이가 여성에게 천하에 못된 짓을 저질렀다면 통렬한 반격이고, 그렇지 않다면 조금은 잔인한 짓에 해당한다.

어쨌든 여성의 행위엔 보는 이의 허를 찌르는 도발적인 당당함이 들어 있다. 부부 사이라도 남들 보는 앞에서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남세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적잖게 충격을 받을 법하다. 광고 속 여성은 은밀한 영역을, 게다가 가장 노출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대상에게 적극적으로 공개한다. 그의 눈빛과 행동엔 일말의 주저도 없다.

스카이 광고의 제작진은 질척거리는 미련의 유예기간 없이 ‘쿨’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을 막바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20대 여성의 세련된 사랑법이라고 설명한다. ‘잘 봐, 네 자리에 누가 있는지’란 문자메일은 제작당시 200개의 후보작 가운데 건져올린 ‘유레카’의 산물. 섬뜩하면서 매혹적인 광고의 분위기에 방점을 찍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복수를 꿈꾼 적은 있지만 복수의 스트레이트는커녕 훅조차 날려본 적이 없는 자에겐 이번 CF의 배포 좋은 에피소드는 일종의 대리만족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과연 ‘이브의 경고’에 아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조재원/<스포츠서울> jo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