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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초라한 뒷모습
2001-09-13

컴퓨터 게임/ <울티마>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아무리 대단한 전설이 될 이야기라도 시작은 초라하다. 모든 이야기에는 또한 끝이 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이 아름다운 전설은 많지 않다. 성공에 만취해서, 또는 지쳐서, 그것도 아니면 어느새 세상이 변해서, 물러갈 때를 놓친 전설은 초라한 모습으로 사라진다.

<울티마>는 이 코너에서도 몇번 이야기된 유명한 롤플레잉 게임이다. 이 게임을 만든 리처드 개리엇은 <문명> 시리즈의 시드 마이어나 <블랙 앤 화이트>의 피터 몰리뉴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제작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가 <울티마>를 기획하고 만들기 시작한 건 스무살도 안 되었을 때였다. 79년 처음 시리즈가 시작되었으니 벌써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시리즈는 9편까지 이어졌다.

<울티마>는 심오한 설정과 철학적인 세계관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실과 평행적으로 존재하는 또다른 세계에서 선택받은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한다. 하지만 뻔한 마왕 물리치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미덕과 믿음으로 여러 세력의 갈등을 조정하고 치유하고 회복시켜야 한다. 개리엇의 철학은 높은 자유도를 가진 독특한 시스템으로 구현되었고, <울티마>의 팬덤은 그 어떤 게임보다도 견고하게 구축되었다.

시리즈는 1부 <블랙 게이트>와 2부 <서펀트 아일>로 나뉘는 7편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오직 이 게임에만 사용되는 ‘부두’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메모리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조금밖에 불평하지 않았다. <울티마> 때문에 PC 메모리 관리의 달인이 되었다는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롤플레잉 게이머가 아닌 ‘울티마 게이머’가 적지 않았다. 그렇게 <울티마>는 전설이 되었다. 가게 점원을 하던 한 청년의 입지전적인 이야기는 멋지게 완성되었다. 하지만 전설은 거기서 끝나주질 않았다.

8편은 지금까지와 달리 액션성을 강조했다. 어떤 사람들은 당황했고 그중 몇몇은 <울티마>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은 <울티마>의 전설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9편 역시 실망스러웠다. 너무나 높은 컴퓨터 사양을 요구해서 소수만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됐을 뿐만 아니라, 뭔가 만들다만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울티마>의 전설은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처드 개리엇에게는 <울티마 온라인>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게임세계에서 살아가는 경험’을 이상적인 형태로 실현해주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이었다. 기존 시리즈의 명망은 예전같지 않아도 게임 속에서 ‘로드 브리티시’로 불리며 추앙받는 그의 명성은 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리처드 개리엇은 자신이 부정했던 형태의 게임, <울티마>와는 거의 정반대로 해도 좋을 NC소프트의 <리니지>로 자리를 옮겼다. <울티마 온라인>을 부정하고 <리니지>를 칭찬하는 그의 발언에 남아 있던 울티마 게이머들까지 등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개리엇이 떠난 <울티마 온라인>은 PK를 허용하며 커뮤니티라는 이름의 패싸움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갖춘 ‘한국형’ <울티마 온라인>을 새롭게 서비스한다고 발표했다.

사람은 변한다. 전에 가졌던 생각을 언제까지나 유지하는 건 강직하다기보다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반성과 부정은 다르다. 완전히 뿌리부터 다르다. 반성은 과거를 인정하며 새로운 미래를 낳는다. 하지만 예전의 그 자신을 부정한다면 나는 현재의 그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박상우/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