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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하는 ‘착한’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누구나 깨닫지는 못하는 수의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하는 ‘착한’ 영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원초적인 수(數).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수학의 세계에 매혹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순수한 것이야말로 수학의 세계라는 것을. 하지만 그걸 말로 설명하거나,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절대적인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박사의 말처럼 ‘용기와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느껴야 한다, 마음으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순수한 수학의 세계와 맞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리고 우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따뜻한 영화다. 부드럽게,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인도해주는.

10살인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는 쿄코. 배운 게 없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육체노동 즉 가정부 일뿐이지만 언제나 프로페셔널하게, 누구보다 활기차게 살아간다. 몇년간 수없이 가정부가 바뀌었다는 박사의 집으로 파견된 쿄코는 박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박사는 10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유지하는 시간이 80분밖에 안 된다. 더이상 박사에게는 추억이란 것이 없다. 한때 수학교수였던 박사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하루를, 외롭게 ‘수’만을 벗 삼아 살아가고 있다. 시간은 멈추어진 채, 그저 반복되는 하루를 지워버리는 것뿐.

박사는 처음 본 쿄코에게 묻는다. 신발의 수치가 어떻게 되냐고. 24라고 답하자, 24는 4의 계승이고 고결한 숫자라고 말해준다. 이렇듯 박사는 언제나 수학 이야기만을 한다. 쿄코의 생일이 2월20일이라고 하자, 자신의 시계에 적혀 있는 284라는 숫자와의 관계를 말해준다. 220의 약수의 합은 284이고, 284의 약수의 합은 220이 된다. 그런 관계를 우애수라고 한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220과 284는 기묘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박사는 교코의 아들을 보고는, 루트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루트는 어떤 숫자이건 공평하게 감싸준다면서.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숫자로 설명할 수 있고, 숫자로 치환할 수 있다. 박사에게 수학의 세계는,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그 자체다.

처음에는 어딘가 괴팍한 사람이 아닐까, 라고 걱정했던 쿄코는 박사가 너무나도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쿄코가 박사의 저녁 식사를 해주는 동안 아들이 혼자 있다는 것을 안 박사는 매일 아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한다. 그날부터 박사와 쿄코 그리고 루트는 기묘한 가족이 된다. 모든 것이 달랐던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수학과 야구다. 그들이 누구이건,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건, 수학과 야구는 그들을 통하게 하는 다리가 된다. 박사가 수학 이야기를 하는 것은, 타인과의 교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수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지역이나, 나이나, 성별 같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박사가 왜 수학을 택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박사가 왜 수학에 선택받았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수학문제를 푸는 것은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수학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박사는 수학과 가장 닮은 것이 농업이라고 말한다.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리고 보살피는 것이 농업이다. 수학도 자신의 필드를 정하고, 사색을 시작한다. 온갖 노력을 해야 하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은 씨앗의 자라는 힘이다. 농부는, 수학자는, 그저 그것을 북돋워주고, 발견할 뿐이다. 이런 통찰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박사는 수학을 통해, 이 세계의 본질을 깨달은 현자다. 하지만 박사는 이미 이 세계에서 이탈된 존재다.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고,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과거는, 여전히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슬프다. 아침마다 일어나 양복에 매달린 쪽지에 붙어 있는 ‘내 기억은 80분간만 지속된다’란 말을 보았을 때, 그는 탄식할 것이다. 날마다, 날마다 그 탄식은 반복된다. 박사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지나간 과거에서, 박사 혼자만이 머물러 있다. 그 쪽지를 본 박사는 생각했을 것이다. 나에게 남은 것은 수학뿐이라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영원한 것은 수학뿐이라고.

수학의 본질은, 그것 자체로 완전하다. 완전수처럼. 수학이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수학의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수학을 하는 목적은, 진실을 찾는 것이라고 박사는 말한다. 거기에 진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박사와 똑같다. 박사는 더이상 현실과는 아무런 연계가 없지만, 박사는 진실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용기와 현명함은,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쿄코와 루트는, 박사를 통해서 세계의 다른 얼굴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바로 오일러의 공식이다. ‘e를 π와 i를 곱한 수로 거듭제곱하여 1을 더하면 0이 된다… 어디에도 원은 없는데 하늘에서 π가 e 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 모순되는 것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결국은 무를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정체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박사와 쿄코와 루트가 만나 서로의 마음을 연결할 때, 영원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그건 절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원작은 아쿠타가와 수상 작가인 오가와 요코가 2004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정수, 소수 같은 수학 용어가 서서히 시의 언어로 다가왔다’라는 평처럼,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얼핏 차가워 보이는 수의 세계에 상존하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한껏 전해준다. 영화도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차분한 소설을, 정갈하게 영상으로 옮겼다. 조금 지루한 구석도 있지만, 수의 세계에 집중할 수만 있다면 그것 모두가 아름다움의 한 표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어른이 되어 수학 선생이 된 루트가 아이들에게 박사의 이야기를 전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영화판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무난하고, 정석을 따른 각색을 보여준다. 수학의 형식적인 딱딱함처럼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평범하게 관객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수’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순간, 쿄코와 루트가 그랬듯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늘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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