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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없다 (2)
2001-09-19

미국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비꼰 독립영화계의 기대주 토드 솔론즈

토드 솔론즈 ‘표’ 영화를 만들다

토드 솔론즈의 독설은 특이한 인물군상의 상황이나 대사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자주 정신박약이나 저능아, 호모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에게조차도 감독은 연민의 시선을 거둔다. <인형의 집으로…>를 원래 <호모와 백치들>(Fagots & Retards)로 하려 했다는 감독의 의도에서도 배어나오듯, 그는 뉴저지의 지형도로 대표되는 미국 중산층의 삶을 영혼이 휘발되고 물질주의에 휘둘려 행복이라는 선물을 발로 차버리는 백치의 장소로 제안한다(이러한 측면에서 <인형의 집으로…>의 주인공 이름이 돈 즉 ‘Dawn’인 것도 다운 신드롬의 정신박약을 연상키지 않는가?). 이곳에서는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정체성 상실로 비틀거리고, 아이들은 조숙한 어른처럼 행동하지만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늘 삼형제가 부모 사랑으로 티격태격하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우아한 저녁 식탁이 등장하는 토드 솔론즈의 영화들은 그러나 늘 직장과 집안 곳곳에 들이닥친 칸막이들처럼 사랑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비밀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정서를 은밀히 타인에게 전달하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번번이 호기심과 동정이라는 칸막이 속에 다시 저당잡힌다. 영화 형식적으로도 토드 솔론즈의 주제와 대사는 송곳니처럼 날카로운데도 그의 카메라는 개개의 셧들을 충돌시켜 여분의 의미를 자아내려 하는 법이 없어서 역설적으로 더 따끔하다. 나란히 두 인물을 한 화면에 잡은 투숏 위주의 미니멀한 화면들은 역설의 위선과 거짓의 정다움을 표지하면서 기존의 영화언어를 끊임없이 배반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제 쿠엔틴 타란티노와는 완전히 정반대 방식으로 뉴욕과 뉴욕대를 경유하여 미국 내에서 어떤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4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세 번째 영화를 만드는 통에 토드 솔론즈는 아직도 젊은 감독의 이미지를 뿌리고 다니지만, 노아 바움바우와 캐시 레먼즈, 브라더 휴 등의 젊은 독립영화 기수들과의 경쟁에서 벗어나 이미 토드 솔론즈 ‘표’라는 확실한 작법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즈와 <쓰리 킹즈>의 데이비드 러셀, 혹은 <매그놀리아>의 폴 토머스 앤더슨. <X맨>의 브라이언 싱어의 아메리칸 뉴웨이브군의 감독과도 한데 묶이지 않는다. 두껍게 돌아가는 거북이 등 같은 안경, 더벅머리에 청바지 바람의 하릴없는 뉴욕의 예술가 스타일인 그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결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는 <해피니스>의 극단적인 내용 때문에 유니버설사가 미국 내 배급을 거절하자, 아예 ‘굿 머신’이라는 자체 배급회사를 차려 미국 내 배급을 독자적으로 감행하는 배짱을 보여주기도 했다).

<스토리 텔링>, 전작의 상처에 다시 칼을 꽂다

금번 칸에서 선보인 그의 네 번째 작품 <스토리 텔링>은 크게 ‘픽션’과 ‘논픽션’으로 나뉜다. 1부인 픽션에서는 한 금발의 여학생이 퓰리처 수상자이자 흑인인 남자교수와의 지난 밤을 작문으로 그대로 옮겨 써서 수업시간에 발표한다. ‘깜둥이가 백인여자와 섹스한다’를 밤새 외쳐야 했던 여학생은 있는 그대로 일어난 일을 썼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흑인 교수는 그것이 쓰여졌을 때는 이미 픽션이라며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을 변호하고,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솔론즈는 이미 하나의 슬로건이나 클리셰로 전락한 미국의 가치들- 장애인, 여성, 유색인종에 대한 입에 발리고 상투적인 논의들의 허물을 벗기면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야기의 얄팍함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2부의 ‘논픽션’은 그간 토드 솔론즈 표를 충실히 모방해왔던 <아메리칸 뷰티>에 대한 적나라한 조롱인 동시에, 중산층 3부작의 매듭을 짓는 완결편이기도 하다. 그는 여기에서 <아메리칸 뷰티>의 비닐봉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장면을 그대로 차용해, 주인공의 ‘띨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그것이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나를 희화화한다. 그러나 <아메리칸 뷰티>에서와 달리 <논픽션>에서 비닐은 비닐일 뿐이다. 토드 솔론즈는 마치 <인형의 집으로…>의 주인공 돈이 청년으로 탈바꿈해버린 이야기를 ‘동정없는 세상’으로 거듭 풀어낸 것 같은 반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형의 집으로…>의 마지막 장면은 디즈니랜드로 향하는 돈의 서글픈 얼굴이었다. 진정 토드 솔론즈의 영화들은 <아메리칸 어글리>의 전형으로 끝날 것인가? 솔론즈는 아물지 않은 전작의 상처들에 다시 독설의 칼을 꽂아 비틀면서도 여전히 관객을 웃기는 그런 사람이다. <스토리 텔링>은 결국 지구상의 모든 이야기는 일종의 타인의 삶에 대한 거대한 착취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독설에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겠지만, 신이 주신 불공평함과 타인에게 받는 상처가 매우 균등하게 지구상에 퍼진다면, 어쩐지 그의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을 신성 모독하는 전사들의 윗자리에 토드 솔론즈의 이름을 새기며, 여전히 소멸기간이 불확실한 어떤 ‘전염’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필모그래피

1989년, <공포, 근심 그리고 우울>(Fear, Anxiety & Depression)

1995년,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Welcome to the Dollhouse)

1998년, <해피니스>(Happiness)

2001년,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 가족은 없다 (1)

▶ 가족은 없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