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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감독의 스릴러<마의 계단>
2001-09-20

죽거나 혹은 복수하거나

1964년, 감독 이만희 출연 김진규 <EBS> 9월23일(일) 밤 10시

“이만희 감독이 좀더 살았더라면 1980년대의 한국영화는 더욱 화려했을 거다.” 어느 평자의 언급은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이미 타계한 감독에 대해 ‘가정형’을 붙인다는 건 아무래도 적절한 비유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공중파 방송을 통해 꾸준히 방영되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를 보노라면 이같은 언급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공감할 만하다. 1960년대 이만희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그야말로 한편의 ‘미스터리’다. 예컨대 1967년에 그는 10여편이 넘는 영화를 단 일년에 찍으면서 왕성한 다작을 과시했다. 영화 장르를 거론하더라도 멜로와 전쟁영화는 물론이고, 스릴러와 액션영화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은 장르가 거의 없을 정도다.

작업 수준은 그런 대로 평균작을 꾸준히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마의 계단>(1964)은 이만희 감독이 만든 미스터리 스릴러다.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여인의 한이라는, 토속적인 소재를 취하면서 감독은 예의 영상파 감독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최소한 당대의 국내 영화감독 중에서 이만희 감독만큼 영상의 조형적 측면, 다시 말해서 영화를 장르와 내러티브에 국한하지 않고, 풍부한 미장센과 상징의 결정체로 사고했던 연출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마의 계단>은 한 남자의 출세기와 그에게 복수를 꿈꾸는 여성의 이야기다. 병원에 근무하는 현 과장은 원장 딸과 약혼하기로 내정되어 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간호사인 진숙과 현 과장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현 과장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은닉하기 위해 진숙을 살해한다. 현 과장은 병원 구석의 늪에 진숙을 빠뜨리지만, 그녀의 시체는 며칠이 지나도록 발견되지 않고 현 과장은 점차 진숙의 환영을 보게 된다.

<마의 계단>을 보면서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한 남자의 성적 일탈이 처참한 복수극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의 계단>에서 이만희 감독은 공간활용에 있어 대가의 솜씨를 보이고 있다. 현 과장은 실수로 계단에서 진숙을 밀어 떨어뜨린다. 그는 결국 진숙의 입막음을 위해 그녀를 살해할 결심을 한다. 차가운 빗줄기가 내리는 밤, 현 과장은 약에 취한 그녀를 등에 업고 가파른 병원 비상구 계단을 힘겹게 내려간다. 영화에서 ‘계단’은 한 남자에겐 성공을 위한 상승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에게 희생당한 여성에겐 끝없는 추락의 과정일 따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은 붕괴한다.

남자가 여자를 늪에 빠뜨린 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녀의 머리를 완력으로 물웅덩이에 처박을 때, 남자는 자신의 발끝이 이미 한 걸음씩 하강의 움직임을 시작했음을 감지한다. <마의 계단>에서 병원은 차츰 공포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성공을 위해 달려가던 현 과장은 부를 얻기 위해 결혼하지만 그에게 병원은 알 수 없는 환영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이 되어버린다. 어딜 가든 죽어버린 여성이 그의 시선을 제압하고 몸을 얼어붙게끔 만드는 거다. 남자의 환영은 병원 수술실에서 극에 달하는데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죄상을 실토하게 된다. 이만희 감독은 히치콕 감독의 스릴러물에서 받은 영감을 적절하게 첨가하면서 <마의 계단>을 빼어난 장르영화로 만들어냈다. 이처럼 고전적인 품격을 유지하면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스릴러영화를 1960년대에 만들어냈다는 건,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