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상대에게 부담없는 이성친구임을 자처하는 것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고속도로변 “만남의 광장”만큼이나 부담없는 친구인 탓에, 다른 사랑으로 기뻐하고 아파하는 그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친구와 연인 사이의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동안 고백은 자꾸 연기되고 아픔의 무게만 늘어난다. 영화 <무지개 여신>은 그런 아픔을 ‘뒤늦게’ 쫓아가는 추억담이다. 항상 같이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지만 알 수 없었던 친구의 아픔이다.
아오이(우에노 주리)에게 토모야(이치하라 하야토)는 야속한 이성친구다. 토모야는 아오이를 통해서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전하고 러브레터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지만, 사실 아오이는 토모야를 향한 사랑을 에둘러 감추고 있다. 하지만 눈치없는 토모야는 언제나 그녀를 좋은 친구로만 여길 뿐이다. 대학 졸업 뒤 유학을 결심한 아오이는 내심 토모야가 잡아주길 기대하지만, 이때도 역시 토모야는 그녀를 무심히 떠나보내고 만다. 이후 각자의 생활에 충실히 살고 있던 어느 날, 아오이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토모야는 그녀의 집을 찾아가, 그곳에서 대학 시절 아오이에게 대필을 부탁했던 러브레터를 읽게 된다.
<무지개 여신>은 이와이 순지 감독이 기획, 각본, 제작을 맡은 작품이다. 학창 시절의 짝사랑, 뒤늦게 배달된 편지 등의 모티브는 그의 전작인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에서도 봤음직한 것들이다. 하지만 연출을 맡은 구마자와 나오토 감독은 이와이 순지의 후광 아래에서도 뒤늦은 사랑의 발견과 그로 인한 애틋함을 화사하게 수놓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다. 두 남녀가 마주선 공간은 여전히 생기있고 아련하지만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일은 없다. 첫 만남에서 사랑을 예고하는 무지개 역시 그저 물웅덩이에 수줍게 비칠 뿐이다. 대신 감독은 이들이 나누는 속깊은 대화와 아기자기한 유머 그리고 고백이 혀끝까지 차오른 여자와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남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과 설렘을 밀도있게 채우고 있다. 이들을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보다도 토모야의 농담 같은 프러포즈다. 진심일까? 농담일까? 섣부른 기대마저 상처가 되고 마는 이 순간에도 아오이의 속내는 과장되지 않는다. 우에노 주리의 연기는 영화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한층 더 포개놓는다. 숨겨둔 사랑에 아파하면서도 꿋꿋한 모습을 섬세하게 포착한 그는 아오이를 옆에 두고 토닥여주고 싶은 친구로 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