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욕구를 비판하기 위해 인용되기도 하지만, 하늘을 찌를 듯 오만불손한 건축물을 짓는 인간에게 야훼가 내린 벌 때문에도 자주 언급되곤 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야훼는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창세기 11장7절) 했고, 결국 바벨탑 건설은 무산됐다. 이때의 벌 때문에 애초 하나의 언어와 단어를 사용하던 인류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됐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믿기 어렵지만, 이 ‘세계화’ 시대에도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때문에 사람들이 전면적으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상황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바벨>이 다루는 대상도 서로의 진의를 도무지 전달하지 못하는 이 세계 속에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다. 지구의 4개 지역에서 벌어지는 총체적 소통의 위기는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사막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염소떼를 위협하는 자칼을 잡기 위해 친구로부터 윈체스터 장총을 구입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자칼 사냥을 맡긴다. 어느 날 둘째아들 유세프는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총을 발사한다. 공교롭게도 이 총알은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미국인 관광객 수전(케이트 블란쳇)의 몸을 관통하고, 남편 리처드(브래드 피트)는 버스의 기수를 관광가이드가 살고 있는 마을로 향하게 한다. 이 우연한 사고는 미국 샌디에이고의 한 가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수전과 리처드의 두 아이를 돌보고 있는 멕시코인 보모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는 사고 때문에 부부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두 꼬마와 함께 멕시코 고향 마을로 향한다. 결혼식을 마치고 미국 국경을 넘던 도중, 조카 산티아고(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때문에 아멜리아는 두 아이와 함께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비슷한 시간, 일본 도쿄에서는 어머니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농아 소녀 치에코(기구치 링코)가 모로코에서 일어난 총격사고 뉴스를 지나치고 있다. 치에코는 주변 사람들과 단절감을 느끼게 되면서 남자들에게 몸을 내던지려 한다.
<바벨>이 네개의 지역을 건너뛰면서 던지려는 이야기는 자명해 보인다. 바로 바벨탑의 저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바라보는 바벨탑의 저주는 지역과 국가 사이의 언어 차이가 아니다. 리처드와 수전은 말도 통하지 않는 모로코의 시골 마을에서 응급처치를 받지만,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쉽게 전달된다. 아멜리아의 손을 붙들고 멕시코의 한 동네로 들어간 두 미국 아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지만, 어린이들의 마음으로 다른 멕시코 아이들과 금세 친해지고 마을 사람의 뻑적지근한 파티에서도 즐겁게 뛰놀 수 있다. <바벨>이 드러내는 진정한 소통의 장벽은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상을 입기 전 수전은 “이곳의 물을 마시면 질병에 걸린다”며 리처드에게 얼음조차 먹지 못하게 하며, 중상을 당한 뒤에도 이방인들의 응급처치를 믿지 못하겠다며 거부한다. 미국 국경수비대는 백인 아이들을 가리키며 “내 조카예요”라고 말하는 산티아고의 농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로코 아이들의 치명적이지만 우발적인 장난은 정치적 테러리즘으로 간주된다. 수전 부부와 함께 낯선 마을에 머물다 “집단 테러를 당할지도 모른다”며 버스를 타고 도망쳐 버리는 서구 관광객의 모습에서는 ‘여행은 다른 곳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는 수단’이라는 명제를 찾아볼 수 없다. 결국, 21세기 바벨의 저주는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 특정한 세계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잘못 해석되는 데서 발생한다.
이 소통의 장애 속에서 <바벨>의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모로코에서 발사된 총알의 파동은 북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중앙아메리카로 파급되고, 또 이 모든 것은 도쿄의 누군가와 관련을 맺고 있다. 흡사 ‘나비효과’를 연상케 하는 사건들의 연쇄작용은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전작 두편에서도 이미 등장했던 것이다.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세 사람, 또는 세 집단을 보여주는 <아모레스 페로스>나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서 세 사람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21그램> 모두 하나의 충돌이 빚어내는 사람들 사이의 오묘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바벨>이 앞선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영화의 축을 이루는 네 그룹의 인물들이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로코의 가족, 미국인 부부, 멕시코인 가정부와 미국인 아이들, 일본의 소녀와 아버지 중 미국인 부부와 멕시코 가정부와 아이들만이 연결지어질 뿐, 나머지는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행위는 다른 두 영화에서 그랬듯,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운명론에 가깝다. “인생은 매일 아침 6시에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는 자신의 지론처럼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바라보는 세계는 비관적인 결정론 속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벨>에서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그의 통찰은 불균질하다. 한 소년의 치명적이지만 우발적인 행위는 왜 한 여인의 목숨을 위협하는지, 이 사건은 왜 한 멕시코 여인의 삶을 통째로 무너뜨리려 하는지, 불분명하다. 이들이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은 단지 운명의 주사위 놀음이 빚어낸 결과인 듯 보인다. 물론, <바벨>의 다른 한축에는 정치적 함의가 녹아 있다. 주인공들 사이에서 전면적인 소통을 가로막는 가시장벽은 한쪽만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뾰족한 가시는 1세계에서 3세계를 위협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연쇄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1세계의 사람들은 상대적인 해피엔딩을 맞는 데 비해, 저개발 국가의 사람들은 우울한 결말 속으로 빠져든다. 그 뒤에는 포스트 9·11 시대라는 이름 아래 만연해 있는 서구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낯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무관심과 배타성이 자리한다.
특히 도쿄에 살고 있는 농아소녀 치에코와 아버지(야쿠쇼 고지)의 에피소드는 사건의 연쇄작용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지만, 소통의 정치학이라는 차원과는 무관해 보인다. 치에코가 겪고 있는 소통장애는 농아라는 사실에 개인적인 고통이 더해지면서 심해지지만,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가 섬뜩하게 잡아낸 갑갑한 도쿄의 풍경과 맞물리면서 현대 도시인이 감내해야 하는 일반적인 고립감으로 전화돼 다가온다. <바벨>은 첨예한 국제정치학과 현대인들 사이의 단절, 그리고 좀더 근본적인 인간의 실존이라는 상황을 정확한 연결고리 없이 버무린 뒤 ‘감정에는 통역이 필요없다’는 식의 희망적 결론까지 덧붙이는 탓에 혼란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영화다. 때문에 <바벨>은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연쇄충돌 3부작’이라는 맥락에서 봐도 일정한 퇴보로 느껴진다. 물론, 그 실망감은 세상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력과 감성을 두드리는 연출력을 갖고 있는 곤잘레스 이냐리투에 대한 기대감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