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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피를 흔든 결단의 밤은 어디로, <아라비아의 로렌스>
2001-10-10

사춘기 시절 집이 충무로에 있었다. 축복이었나? 여하튼 인생은 훨씬 더 흥미로웠다. 15분만 걸으면 대한, 명보, 국도, 스카라, 그리고 그 고마운 젊은이의 메카, 재개봉관 아테네 극장이 있었으니 시네마 천국이었다. 머리 길게 기르는 중·고교를 다닌 덕에, 어른스런 외모 덕에, 물론 눈 잘 감아주는 극장 덕분에 나의 사춘기는 영화로 채워졌다. ‘범생’으로 믿어주던 학교와 부모 몰래 나의 홀로 반란은 영화관에서 일어났던 셈이다. 어떤 해에는 읽은 소설 숫자보다 본 영화 숫자가 더 많았다. 매주 한편의 영화를 본 셈이다. 과하긴 과했다. 그러나 좋았다. 그때 봤던 수백편의 영화 중에서도 강한 기억에 남는 영화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세 번 봤다. 두 번째, 세 번째는 혼자 가서 보았다. 도대체 그 영화 무엇에 그리 끌렸을까? 세 시간 길이의 영화, 사막처럼 따갑고 건조한 영화, 여자는 한명도 안 나오는 영화. 오직 한 장면을 보는 것만도 좋았다. 사막의 밤, 바람이 불면서 모래 위에 일렁이는 파도를 만드는 밤을 꼬박 새고 로렌스가 홀로 결단을 하는 장면이다. “아카바, 아카바, 사막을 건너서!” 나는 지금도 다시 느낄 듯하다. 영화 보고 집으로 가는 길, 초가을의 바람은 서늘하고 뙤약볕은 따가운 거리를 걸으며 내 팔뚝에 돋던 그 소름을. “나는 어떤 결단을 할 수 있을까? 멋있다. 결단이란….” 얼마나 어렸던가. 15살 소녀는 ‘혁명적 낭만’에 눈을 떴던 셈이다.

영화는 ‘아라비아의 무관 왕’이라 불렸던 영국의 전설적 영웅 T. E. 로렌스를 그린다. 수에즈운하를 둘러싸고 영국과 독일이 한판 붙는 1차 세계대전 무렵, 터키와 동맹관계인 독일에 대항하느라 영국은 아랍 독립운동의 선봉인 파이잘 왕자와 연합하려 한다. 카이로에서 군사지도 교관으로 근무하던 로렌스는 사막으로 들어가 파이잘 왕자를 찾고 게릴라전에 온몸을 투입한다. 아랍인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아랍 옷을 입고서. 로렌스로 분한 피터 오툴은 핏줄 드러날 듯 투명한 하얀 피부, 타오를 듯한 금발, 빨려들어갈 듯한 새파란 하늘색 눈이었다. 사막의 어두컴컴한 색조에 대비되는, 불길한 이미지다. 지적 모험심과 순수한 이상과 격정과 분노와 자기혐오와 자살적 용기로 뒤엉킨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영화를 분석할 역량이라고는 전무했던 그 시절, 그래도 나는 몇 가지 건졌다. ‘사막에는 오직 신과 나만이 있다’, 나의 대사를 만들며 사막의 절대성에 반했었다. ‘이상이란 현실에 지는구나’, 아랍의 자주성을 주장하여 고립무원 내쳐지는 로렌스를 보고 아팠었다. ‘정치는 총칼보다 강하구나’, 결국 정치적 타협으로 국가를 세우는 파이잘 왕자를 보면서 느꼈었다. 이 영화의 전모를 이해한 것은 훨씬 나중이다. 유학 길에서 이슬람 세계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듣고, <오리엔탈리즘>이나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을 읽으면서 열강의 치열한 이해관계와 힘없이 분열된 민족들의 고통 사이에서 나의 현실감각을 키운 듯싶다.

2년 전 70mm 대한극장이 막을 내리는 기념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상영했을 때 나는 딸들과 함께 30여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장면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수에즈운하의 모래둑 위로 거대한 선박이 운항하는 장면, 사막의 아지랑이 속에서 점 하나로부터 드디어 낙타를 탄 늠름한 모습으로 커지는 검은 옷의 베두윈 족장으로 분한 배우 오마 샤리프, 우아하게 하얀 아랍 옷을 입은 로렌스. 딸들도 매혹되었다. 그러나 갈등은 더 깊게 다가왔다. 자기를 학대하는 로렌스와 혐오에 빠진 독일 장교의 동성애적 교감, 외세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파이잘 왕자의 고집스런 자존심과 현실적 타협 사이를 오가는 비굴하고도 지혜로운 얼굴. 로렌스라는 ‘혁명 인간’, ‘이상 인간’, ‘독립 인간’이 설 데는 어디인가?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던가? 15살 소녀가 반했던 사막 위의 그 결단의 밤은 아라비아를 어디로 이끌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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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애 건축가·(주)서울포럼 ‘선농테라스-인사동길-산본신도시’ 등 건축작업 저서 <이 집은 누구인가> <새로운 종의 여자 메타우먼> <프리미어>에 ‘영화대사’ 연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