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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우월주의에 똥침을!
2001-10-11

인종차별을 공격하는 디젤 진 2001 캠페인

“유럽 개발도상국들, 아프리카 담배산업의 표적되다.”

“캘리포니아 폭도들, 148일 만에 아프리카 인질 석방.”

때는 2001년 상반기. <The Daily African>이라는 아프리카의 어느 일간지에 이런 기사들이 연이어서 1면 톱을 장식한다. 세상이 개벽하는 순간인가? 이 무슨 아프리카 붐이란 말인가?

베트남에서 장동건 같은 스타가 한국 붐을 일으키고, 홍콩에서 안재욱이 그들의 가슴에 별로 떴다는 얘기는 있었다. 중국·대만·베트남 등 동아시아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가 치솟는 현상에 힘입어 불어닥친 이른바 한류(韓流) 말이다. 이처럼 ‘아시아에 부는 한류 열풍’이라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어봤어도 아직 ‘서방을 강타한 아프리카 열풍’은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데…. 우리가 모르는 새 서양에 바야흐로 아프리카류의 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누군가가 날조한 기사인가? 아니면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자들이 흑인들 기살리기를 위해 연출한 자작극인가?

더이상 헷갈리기 전에 이쯤에서 기사의 정체를 밝혀야겠다. 올해 칸광고제에서 인쇄부문 그랑프리를 받은 디젤(Diesel)의 ‘for successful living’ 캠페인에 등장한 카피들이다. 백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통쾌한 조롱을 하면서 디젤 진을 입은 한 무리의 흑인들이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대목이다. 제3세계의 서방에 대한 ‘처절한 똥침’이 왁자지껄한 사진장면들에 넘쳐흐르고 있다.

광고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아니,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짜현실이다. 마셜 맥루언의 견해처럼 그야말로 미디어는 메시지다. 상업적 목적을 위해 하나의 그럴듯한 미디어가 만들어지고 밀가루 반죽처럼 주물러진 현실이 그 안에 담기는 것이다. 기상천외한 표현을 일삼던 디젤 청바지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올해에는 <데일리 아프리카>라는 가상의 신문을 하나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흑인들의 인종 콤플렉스를 마사지하고 있는 광고. 마치 흑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광고주나 제작자, 모두가 백인들인 만큼 백인들의 아량과 여유가 한껏 과시된 패러디풍의 하이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신문기사가 현실을 비꼬고 조롱하는 것이 유례없는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저 유명한 <딴지일보>가 있지 않은가? ‘한국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을 자임하는 풍자전문지 말이다. 이 엉뚱한 신문처럼 ‘인류의 원초적 본능인 먹고 싸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 현실 패러디에 <The Daily African>이란 가짜매체가 동원된 것이다.

디젤은 1985년 이태리의 Renzo Rosso가 발족시킨 작업복/청바지 브랜드이다. 이 제품이 지금처럼 독특한 개성의 컬트브랜드로 거듭나게 된 것은 1990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는 DDB Paradiset이라는 광고대행사를 만나고부터다. 특히 ***우리말로 옮겨주세요Joakim Jonason이라는 걸출한 아티스트에 의해 진행된 ‘Successful Living’ 캠페인은 1992년부터 오늘까지 10년 동안 100개도 넘는 광고물을 선보이면서 광고사에 디젤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해가고 있다.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성공적인 삶으로 이끄느냐’라는 해법을 표방하면서 저질스럽고 본능적인 표현을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표현으로 새로운 브랜드의 장르를 만들어가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디젤광고의 표현특징 중 하나는 이미지의 모호성이다. 이 광고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해석이 어렵다. 요즘 국내에서 난해하다고 입을 모으는 TTL, NA, Biggi, 카이홀맨 같은 정보통신 서비스의 CF가 무색할 지경이다. 하지만 광고를 판매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문화를 실어나르는 대중문화의 그릇으로 보면 마냥 선문답만은 아니다. 특히나 기성세대가 아닌 10대들의 감수성에는 광고는 이미 논리나 의미가 아니라 느낌과 기호로 자리매김되고 있지 않은가? 하나의 메시지로 반응을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제각각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심리적 여백이 철저히 계산된 탓이리라.

디젤광고는 이제 제품의 기능을 파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문화를 팔고 세상의 시사문제를 팔고 문명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 디젤이 인종주의를 들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기존의 판에 박힌 백인우월주의의 시각으로는 더이상 디젤이 추구하는 새로운 타깃의 이미지를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디젤이 추구하는 새로움의 영역을 더이상 키치와 엽기, 문명조롱 등의 지극히 가벼운 주제만으로 표현해가기에는 스스로 진부함을 느낀 것일지 모른다.

제작연도 2001 광고주 Diesel 제작 Paradiset DDB, Stockholm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Joakim Jonason 카피라이터 Jacob Nelson 포토그래퍼 Peter Gehr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