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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안녕, 우리의 오랜 벗이여
정지영(영화감독) 2007-03-27

<남부군>의 정지영 감독이 3월17일 순직한 언론인 이헌익을 추모하며

어떤 가수가 노래를 그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떤 시인이 시를 그보다 더 사랑할 수 있을까? 화가보다 더 그림을 사랑했고, 영화감독보다 더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 이헌익.

그가 돌연 우리 곁을 떠났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초여름이었다. 영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디며 그가 선택한 첫 인터뷰 상대가 바로 곧 개봉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영화 <남부군>의 감독 나, 정지영이었던 것이다. 그때 이헌익 기자가 쓴, 영화사적 의미에 초점을 맞춘 <남부군> 기사는 영화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신문 지면이 요즘처럼 풍부하지 않았던 그 당시, 한 꼭지의 영화기사가 지면 한 페이지를 다 차지한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개봉 당일, 구름처럼 몰려드는 관객을 바라보며 가슴 뿌듯해 하고 있는 참에 이헌익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갑게 수화기를 든 내게 던진 그의 첫 대사는 나를 적지 않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야, *팔… 니가 <남부군> 만든 거 맞아?!… 니가 소위 민족영화라는 <남부군> 만든 놈 맞냐구?”

어?… 이 친구 왜 이러지? 나보다 일곱살이나 어린 초짜 영화기자가… 게다가 초면부터 호의적이었던 대학 후배 아니었던가? 내가 도대체 무슨 실수를 했지?

영화감독의 뜻과 관계없이 영화 마케팅을 위해 개봉 즈음해서 기자에게 촌지를 주는 게 관례화되어 있던 시절, 기획실에서는 그 관례를 예외없이 이헌익 기자에게도 적용했고, 그는 자신을 그런 기자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몹시 불쾌하고 자존심 상했던 거다. 제길, 근데 왜 감독에게 지랄이야….

그날 저녁 나는 그를 만나 술잔을 앞에 놓고 촌지문화를 개탄하고 해명하고 변명하며 그의 실망감을 달래야 했다. 그는 술꾼이었고, 죄인인 나 역시 그날만큼은 술꾼이 되어야 했다. 바로 그날, 억지로 술꾼이 되어 밤을 지새우며 술마시는 동안 우리는 이중섭에서 앤디 워홀로 갔다가 허영만으로, 김현식에서 바흐, 비틀스로 넘나들면서 예술을, 삶을, 철학을, 여자를 논했고, 목이 터져라 사랑과 이별을 노래했고, 어느새 나는 그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그런데 그에게 빠져든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만나는 영화인들마다 매혹(?)시키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선한 바람이 되어 영화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1990년대 상반기, 한국 영화계에 젊은 프로듀서들이 참신한 기획과 마케팅으로 새바람을 일으킬 때, 그는 그들의 존재감을 대내외적으로 확인시키면서 때로는 친구가 되고, 때로는 적이 되어 그들을 격려하고 자극했다. 이제는 한국 영화계의 기둥이 된 이른바 1세대 프로듀서라고 칭하는 이춘연(<여고괴담> 등 제작), 신철(<편지> <약속> 등 제작), 유인택(<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 제작), 심재명(<접속> <해피엔드> 등 제작), 안동규(<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제작) 등이 그들이다.

그는 또한 영화감독들에게 술을 사주는 것을 큰 즐거움의 하나로 생각했다. 시사회를 마치고 기자 간담회가 끝나면 기자들은 기사 마감을 위해 회사로 달려가게 마련이다. 회사로 달려가기 전 이헌익은 감독에게 꼭 저녁 술자리 약속을 받아내곤 한다. 그가 술을 사주는 대가로 낮에 본 영화를 감독 앞에서 신나게 혹평하는 게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는 다만 또 하나의 아이를 탄생시킨 감독들에게 산고의 기쁨과 허탈함에 대해 듣고 그 정서를 함께 나누고 싶을 뿐이다. 장선우, 박광수 등 아마도 술 빚(?)을 갚지 못한 채 그를 보내는 안타까움에 젖을 감독들이 꽤 많을 것이다. 물론 강우석 감독 같은 친구는 나중에 충분히 술로 술 빚을 갚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젊은 프로듀서, 젊은 감독들에게만 관심과 애정을 준 건 아니다.

그는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 임권택 감독을 끔찍이 존경했고 그분들에게 남다른 사랑을 받은 기자이다. 영화기자가 영화인의 사랑을 받아?

그렇다. 그는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은 영화기자이다. 기자가 해당분야 종사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는 기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을 거란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들에게 싫은 소리 모난 소리 안 했기 때문이지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적어도 영화계에서 촌지를 밝혀서 욕을 먹은 기자는 있어도, 바른 소리 모난 소리해서 욕을 먹은 기자는 한명도 없음을 장담한다.

그러기에 그가 영화기자를 떠나 다른 분야를 맡는다고 할 때, 영화계는 그가 해낸 ‘영화 저널리즘’의 몫을 아쉬워했고, 이태원 사장님을 비롯한 많은 프로듀서들은 다투어 송별파티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영화계를 떠난 건 아니었다.

그 뒤 영화계는 그가 종교분야를 맡고 있든, 문학을 맡고 있든, 데스크를 맡고 있든, 그를 이미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술자리 모임에서는 번번이 그의 이름이 언급되곤 했으며, 결국엔 전화로 불러내어 함께하곤 했으니까.

그런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

어떤 영화인들보다 더 영화를 사랑했던 이헌익. 시인보다 더 시를 사랑했고, 화가보다 더 그림을 사랑했고, 어떤 뮤지션보다 더 노래를 사랑했던 이헌익. 술이 거나해지면 조지훈의 시나 이백 혹은 두보의 시를 무슨 태엽 풀리듯 암송하던 이헌익. 술잔 앞에 혹 여인이라도 앉아 있을 경우 예외없이 펜을 꺼내 그녀의 프로필을 정성스레 스케치하고는 고추장을 손가락에 묻혀 낙관을 찍어주던 이헌익. 이 세상의 추함을 들춰내기보다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려 노력하던 이헌익. 그리하여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한없이 빠져들던 탐미주의자 이헌익.

그가 떠난 지금의 텅 빈 옆자리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안타까움은 비록 나만의 센티멘털리티가 아니리라.

사진제공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