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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삶, 그 이후
2001-10-18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And Life Goes On 1992년,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출연 파르헤드 케라만드

<EBS> 10월20일(토) 밤 10시

개인적으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다시 보고 가슴 찡했다. 지금쯤 이란과 가까운 어딘가에서 비슷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북부 3부작’ 중 한편이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의 허구성을 슬쩍 허무는 방식을 취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폐허가 된 이란 곳곳을 돌아다니는 감독의 시선을 통해 현실의 피폐함, 그리고 전작에 출연했던 아이들의 성장담을 병치해놓는 거다. 궁극적으로 키아로스타미는 영화만들기의 ‘윤리학’을 친절하게 스크린에 풀어놓는 특유의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는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영화의 전부다. 이란 북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영화감독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했던 아이들이 죽지 않았는지 염려한다. 아들과 함께 차를 몰고 길 떠난 감독은 생존자들을 만난다. 감독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무대가 되었던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지진의 피해자들이 의외로 매우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미래에 관한 희망을 놓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감독은 중간에 다른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그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키아로스타미 영화 중 예외적으로 스펙터클이 전면에 배치된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조작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진으로 인해 사람들이, 마을이, 거리가 산산이 부서져내린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영화는 실제 이란의 대지진 현장을 카메라에 포착하고 있는데 많은 희생이 뒤따랐음에도 현지 사람들 반응은 오히려 경쾌하다. “여러 친척들이 죽었지만 나는 그 와중에 결혼했어요. 다음번 재해 때 난 죽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 열심히 살아야죠.” 어떤 이들은 텐트촌에 궁색한 살림살이를 마련해놓고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안테나를 열심히 손본다. 감독은 다큐적인 맥락을 유지하면서 유난스런 ‘감상’은 배제한다. 삶에 달관한 듯한 태도와 긍정적인 시선으로 드라마를 짜맞춰가는 것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키아로스타미의 스타일을 완성한 것으로 봐도 무리없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기법을 인용하면서 길게 찍기로 여운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감독의 다른 작업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현실이 부단하게 변화하고 흘러가는 동안 영화는 어디선가 부지런히 현실을 뒤따라간다. 그런데 결코 현실을 초월하거나 앞지르진 못한다. 매체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 이러한 영화적 믿음에서 키아로스타미의 미학이 탄생한 것은 아닌지.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