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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똑똑한 CINE-ERP, 제작환경 바꾸나
이영진 2007-07-10

영화 스탭 출퇴근 관리 및 근무시간 측정 시스템, 영화 노사협약 효율적 실현 가능

남양주촬영소 제6스튜디오. A영화의 10회차 촬영이 진행 중이다. “제작부장 어디 갔어?” 라인프로듀서인 ㄱ씨는 제작부장 ㄴ씨를 찾아나섰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시각, 촬영장 한구석에서 ㄴ씨는 촬영팀 막내 ㄷ씨와 다툼을 벌이고 있다. ㄷ씨 왈, “왜 내 주급이 이것밖에 안 돼요?” ㄴ씨 왈, “월요일에 한 시간 늦었잖아. 콜타임 시간이 8시였는데 9시에 왔잖아.” 다시 ㄷ씨 왈, “내가 언제 9시에 왔어요? 직접 눈으로 봤어요?” 다시 ㄴ씨 왈, “조명팀 OO이가 그러던데. 9시에 왔다고” ㄷ씨 드디어 폭발한다. “아, 그게 뭔 소리야. 정말 8시에 왔다니까.” ㄴ씨도 지지 않는다. “아니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고자질한 조명팀 OO씨에게 따지러 가는 ㄷ씨를 ㄴ씨가 “괜히 촬영 방해 말라”며 가로막는다. 두 사람,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린다.

영화노사가 4월에 체결한 영화산업 2007 임금협약 및 단체협약이 7월1일부터 발효됐다. 주1일 휴일, 4대보험 가입, 8시간 근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 노사협약의 핵심은 시간을 기준으로 임금이 책정되고, 지급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노사협약을 따르는 영화는 없는 터라 갑작스러운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잡음 또한 발생하진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러한 다툼이 발생할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출퇴근 시간을 놓고 촬영현장에서 드잡이할 일은 없을 듯하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마련한 CINE-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시스템 덕이다. 현장에 똑똑이라 불리는 단말기가 배치되면, 감독부터 막내 스탭들까지 지급받은 영화인카드로 출퇴근을 알리게 되고, 제작사는 이를 바탕으로 출퇴근 관리 및 노동시간을 체크하고 시급을 정하게 된다.

‘똑똑이’ 하나로 출퇴근 및 휴식시간 체크, 각종 수당 지급 간단

CINE-ERP 시스템 도입에 대한 영화인들의 관심은 뜨겁다. 이미 현장 스탭들을 대상으로 몇 차례 자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7월4일 미디액트에서 열린 언론 대상 설명회는 프로듀서, 제작 관련 스탭들로 가득했다. 제협 오기민 정책위원장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제작된 작품들의 예산을 바탕으로 제작시스템 표준화 작업을 하긴 했지만 이를 프로그램화하진 못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시나리오 표준화 프로그램부터 만들어야 하지만 전국영화산업노조의 출범, 단체협약 체결 등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일단 출퇴근 관리 프로그램부터 만들어야 했다”고 배경을 밝혔다. 이날 제협이 공개한 출퇴근 관리 프로그램은 아직 테스트 단계다. 싸이더스FNH, 아이필름 등의 회사에서 시범 운용되고 있는 상황으로, 제협은 7월 말까지 완성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

고작 출퇴근 체크카드 하나 내놓고 큰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괜히 단말기 이름이 ‘똑똑이’가 아니다. 노조협약이 본격 적용되면 스탭들의 근태 관리 및 급여계산이 여간 복잡하지 않다. 출퇴근 및 휴식시간 체크뿐만 아니라 야간, 연장, 휴일 노동에 대한 급여는 따로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CINE-ERP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간단해진다. 제협의 오기민 정책위원장은 “이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불필요한 소모적 노동을 반복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단적으로 영화인카드 발급시 확보한 인명만으로 해외용 프린트를 만들 때 또다시 스탭들의 영문 이름을 확인하고 수정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진다. 또 기입한 부양가족, 자녀 수, 급여 등은 4대보험 가입 등을 위한 기초자료로 쓸 수 있다. 스탭들의 현재 작품 참여 여부와 경력 등을 파악할 수도 있어 인력을 구할 때도 용이하다.

스케줄링 시스템과 인명 DB시스템도 추진 예정

9월에 예·정산 관리 시스템까지 마련되면 똑똑이의 기능은 배가 된다. 먼저 관리자의 인장까지 저장할 수 있어, 지방 장기 출장시 라인프로듀서나 제작실장 등이 정산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 결재를 맡아야 하는 불편함을 줄일 수 있다. 투자사, 제작사는 촬영현장에서의 자금 운용이 투명한지 파악할 수 있어 좋다. 항목이 세분화되어 식대는 얼마, 주유비는 얼마 하는 식으로 조회도 가능하다. 현재 제협은 10월까지 해외에서 사용하고 있는 무비 매직 프로그램을 보완한 스케줄링 시스템도 구축할 예정이다. 이 경우 스탭들은 문자메시지나 홈페이지 접속만으로 촬영 정보를 알 수 있다. 제작부는 전날 스탭들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이 일정을 공지하는 수고를 덜게 된다. 누수는 최대한 줄이고 효율은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제협은 시나리오 표준양식 등까지 포함한 CINE-ERP 시스템을 갖춘 뒤에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등의 지원 및 협조를 받아 인명 데이터베이스 작업 등을 추후 추진할 예정이다. 오기민 제협 정책위원장은 “캐스팅, 로케이션 데이터베이스 작업도 중요하다. 주·조연은 물론이고 엑스트라 정보까지 확보하면 의상 구입이나 오디션 등에도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영어가 가능한 배우, 사투리가 가능한 배우 등의 조건으로 적절한 이를 검색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로케이션 데이터베이스 또한 전문인력들이 각기 갖고 있는 노하우들을 공유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기대했다. 제협은 영진위를 통해 8월1일부터 15일까지 1차 접수를, 10월1일부터 15일까지 2차 접수를 받을 예정이다. 올해는 무료로 제공되지만 내년부터는 일정 사용료를 내야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다.

“제협 소속사라고 해서 굳이 CINE-ERP를 쓸 필요는 없다. 강제할 수도 없다. 하지만 더 많은 비용을 감수하면서 과거의 방식을 고수할 제작사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활용할지 열심히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제협 관계자의 말처럼, 노사협약을 성실히 이행해야 하는 영화인들에게 현재 CINE-ERP 시스템만한 방책이 없다. 제협은 스케줄 관리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부스를 차려 시연회 등을 열고 해외 영화인들에게도 홍보할 계획이다. 영화아카데미, 대학 등과 연계해 강좌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다. CINE-ERP 시스템이 “덩치는 커졌지만 여전히 낡은 작동방식으로 굴러온”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과 동력을 불어넣을 장치가 될 수 있을지 주목을 끌고 있다.

CINE-ERP 구축 사업 추진해온 한진 프로듀서 인터뷰

“CINE-ERP 시스템은 표준화, 자동화가 목적이다”

“2개월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한진 프로듀서는 설명회가 끝나고 난 뒤 담배를 한 모금 깊숙이 들이켜고선 한숨부터 쉰다. 출퇴근 관리 프로그램을 내놓기 직전이지만, 아직 할 일이 산더미 같기 때문이다. 오기민 제협 정책위원장, 김학준 프로듀서, 김명심 제작실장, 김영구 시스템 관리팀장 등과 함께 CINE-ERP 구축 사업을 꾸려온 그는 “먹고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면서도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이니 맡은 일을 열심히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합리적 제작 시스템 구축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에도 많았다. =비슷한 논의는 많았다. 그러던 것이 임단협 추진과 함께 불이 붙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노사협상이 추진되면서 앞으로는 시간 계산, 스케줄 관리가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다. 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고. 그래서 오기민 아이필름 대표 등과 함께 팀을 꾸리게 됐고, 지금까지 왔다.

-영화현장은 일반적인 기업과 다르다. 일반 대기업 등에서 사용하는 ERP 시스템을 도입해 이를 영화계 상황에 맞게 바꾸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단말기 하나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단말기가 대개 붙박이식이다. 회사 출입문 벽에다 걸어놓는. 그런데 영화현장은 수시로 이동을 해야 하다 보니 기존 단말기를 쓸 순 없었다.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어려움은 이런 거다. 급여 산정은 주간 단위인데, 지급은 2주 단위다. 게다가 4대보험은 월 단위다. 계산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이걸 프로그램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노조 등과 좀더 협의할 것으로 알고 있다.

-시스템이 도입되고 가동되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 =미국 대학원에 갔을 때 처음으로 스케줄링 프로그램을 봤다. 그 순간 이걸 한국에 들고 가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부터 들더라. 엑셀 프로그램 열어서 일정을 잘라 붙이느라 고생하는 스탭들에게 말이다. (웃음) CINE-ERP 시스템은 표준화, 자동화가 목적이다. 현재는 100명의 프로듀서들이 100개의 다른 양식으로 제작관리를 한다. 내용은 똑같은데 형식이 다르니 호환이 안 된다. 호환이 안 되니 축적되지 않는다. 앞으로는 스탭들에게 콜을 할 경우에도 1시간 걸리던 것이 1분에 해결될 것이다. 표준화, 자동화를 통해 제작비를 줄일 수 있고 그 몫을 스탭들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 이 시스템 구축의 목적이다.

-예산 및 시간 부족으로 시스템 구축 과정이 거꾸로 됐다. =시나리오 프로그램 만들고 예산 프로그램 만들고 그 뒤에 정산 및 근태관리 프로그램 등의 순으로 만들어졌어야 하는 게 맞다. 다만 우리의 경우는 워낙 7월1일 노사협약 이행이라는 대명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요소들 때문에 다시 뒤집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스템이 마련되면 곧바로 현장에서 적용이 가능할까. =시스템은 장치가 마련됐다고 곧바로 작동하진 않는다. 일단 스탭들도 경력 증명을 위한 증명서를 다 발급받아야 하는 등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어떤 작품이 이 시스템을 맨 먼저 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임단협 테이블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차승재, 오기민 대표의 회사들이 이 시스템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테니 맨 먼저 하지 않을까. 본인들도 그런 바람을 갖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