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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의 계관시인
2001-10-24

데뷔 10여년 만에 주목받기 시작한, 프랑스영화의 숨은 재능 클레어 드니 (1)

● 미국에서 발행되는 영화 비평지 <시네아스트>의 조지 라파엘과 영국의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의 크리스 다크는 클레르 드니의 근작 <아름다운 직업>에 대한 글을 쓰면서 공교롭게도 동일한 문구로 시작한다. 이 둘은 공히 “프랑스영화계가 가장 잘 감춰온 비밀스런 존재”라는 말로 클레르 드니를 정의한다. 여기서 두 평자들이 드니라는 영화감독이 지금껏 지나온 행보에 대해서 경탄과 안타까움이 반반씩 뒤섞인 감정을 갖고 있음을 읽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드니가 이룩해놓은 견고한 영화 세계를 되짚어보면 분명히 경탄할 만하지만, 미국에서나 영국에서나 일반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된 그녀의 영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또한 안타까움을 주기에도 충분한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해 드니는 지금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아 마땅한 그런 시네아스트인 것이다.

한번 더 외지를 인용해보자. 미국의 영화 비평지 <필름 코멘트>는 드니를 가리켜 “아웃사이더들과 유랑자들을 그리는 식민지 시대 이후(post-colonial) 프랑스영화의 계관 시인”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드니의 영화 세계를 간명하게 아주 잘 요약한다고 볼 수 있다. 다소 도식적으로 풀어보자면 드니의 영화들은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있거나 도태되었거나 버림받은 주변인들, 많은 경우 과거의 식민주의 경험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크린 위에 담으면서 그 위에 서정적인 시정(詩情)의 바람을 불어넣은 것들이다. 드니는 데뷔작인 <초콜렛>부터 그런 세계를 구축하면서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고 세련되게 발전시켜 왔다.

“모든 인간은 인종, 국가, 신조 혹은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어떤 것은 할 수 있다.” 드니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죽음은 두렵지 않다>는 체스터 하임즈가 <부조리한 나의 삶>에서 쓴 구절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이민자인 주인공 다(Dah)가 도입부에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한번 더 들려주기도 하는 그 구절은 다의 머릿속 깊은 곳에 박아 넣은 인생 교훈이기도 하지만 감독인 드니 자신이 굳게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의 중요한 한 단편인 것처럼도 보인다. 마치 그것을 증명해보기라도 하듯 드니는 자신의 영화 속 세계를 어떤 특권적 위치, 혹은 정상적 혹은 중심적(이라고 믿어지는) 위치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른바 ‘주변인들’이 무언가를 하는 세계로 만들어낸다. 그녀의 세계는 인종적 주변인들(특히 흑인들)을 정말이지 자주 접할 수 있는 세계이다. <초콜렛> <죽음은 두렵지 않다> <잠이 오질 않아>처럼 흑인들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경우에도, 예컨대 <네네트와 보니> 같은 영화에서도, 드니는 스토리의 전개와 전혀 상관없이 인종적 주변인들에 대한 ‘불필요한’ 크로키를 군데군데 끼워 넣는다. 그렇다고 해서 드니가 그들 주변인들에 대해 맹목적인 호의만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거 식민주의의 존재 이유를 물을 때 흑인- 주변인은 그 어떤 백인 귀족보다도 고결함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지만(<초콜렛>) 현대 도시에서의 악의 진부함을 그릴 때 흑인 게이인 이중적 주변인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게도’ 악덕에 물든 연쇄 살인자로 그려진다(<잠이 오질 않아>). 드니의 영화에서 주변인들이란 어느 한쪽으로 편향된 거창한 정치학을 설파하려는 도구라기보다는 그저 무언가를 해나가는, 살아가는 인물들, 그러면서 자기가 속할 곳을 스스로 질문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프랑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프리카의 말

드니는 ‘국외자적인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매료된 사람임에는 분명한데, 이건 많은 부분 아웃사이더로서 그녀 자신의 실제 경험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니는 자신을 가리켜 ‘아프리카의 딸’(une fille d’Afrique)이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1948년 생인 그녀는 태어나기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삶의 첫 번째 시기를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그녀가 태어난 지 불과 2개월 되었을 때 가족이 모두 아프리카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그녀는 열네살 무렵까지 이제 제국주의의 악몽에서 막 깨어나려 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것이다. 유년기를 검은 대륙에서 보내고 프랑스로 돌아온 드니는 마치 자신의 영화 <아름다운 직업>의 외인부대에서 쫓겨난 갈루가 자기는 민간 생활에 부적합하다고 여길 때와 똑같은 그런 적응불능을 느꼈다고 한다. 바로 그때 그녀가 발견한 것이 아프리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화라는 새로운 영토였다. “영화는 내가 생존해갈 수 있는 영토처럼 보였다.” 당시 장 뤽 고다르, 로베르 브레송,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라는 굉장한 신대륙을 ‘발견’했던 드니는 결국 영화학교(HIDEC)에 진학해 영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에두아르도 드 그레고리오, 짐 자무시, 두상 마카베예프, 자크 리베트, 빔 벤더스와 같은 출중한 감독들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며 현장경험을 충실히 쌓았다.

적지 않은 수의 영화감독들이 그러하듯 드니 역시 실제 자신의 유년기 기억 속에서 캐낸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겨내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의 첫 시기가 시작된 지점을 영화인생의 출발점으로 삼은 셈이다. 드니의 첫 장편영화인 <초콜렛>은 그녀가 세네갈에서 지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만든 반(半)자전적인 작품이다. 그런 태도를 직접적으로 반영이라도 하듯 영화는 드니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상징적이게도) ‘프랑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젊은 여자가 아프리카를 찾아와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살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게 과거로 들어가면 열살도 채 안 되는 보이는 어린 프랑스가 지역의 고급 관료인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그리고 그 백인가족에게 헌신적이며 성실하고 기품있는 흑인 하인 프로테와 지냈던 고요한 삶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리 특별하달 수 없는 두개의 사건을 맞으면서 가족은 미묘한 ‘분열’의 과정을 겪게 된다. 아버지의 출장이 혹 어머니와 하인 프로테 사이에 있었을지도 모를 성적인 긴장을 알 듯 말 듯 ‘불완전하게’ 노출하고 비행기 사고로 인해 프랑스 가족의 집에 머물게 된 몇몇 백인들은 흑인이라는 저급한 인종에 대한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여성과 흑인이라는 식민주의의 두 종류의 주변인이 경험하는 심적인 고통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초콜렛>은 식민주의의 존재에 대해 대놓고 소리치며 항변하기보다는 ‘과연 식민주의가 왜 존재하는 것인가?’ 하고 지극히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는 어린 프랑스의 불완전한 시점을 고수하면서 이런 이야기에 대해 매력적이게 자신없는 태도를 취하고 또 그럼으로써 유년 시절의 노스탤지어로의 함몰이라는 함정에 알게 모르게 발을 집어넣기도 한다. 이런 다소 불확실한 태도를 드니는 오히려 아프리카의 프랑스를, 즉 아프리카의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타자’로 낙인찍으면서 무마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끝날 무렵 프랑스를 태워준 흑인은 그녀의 손금을 좀 보자고 말한다. 그런데 어릴 적에 당한 화상으로 인해 프랑스의 손금은 지워지고 없는 상태다. 그걸 본 흑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겐(즉 프랑스엔) 과거도 미래도 없군요.”

<초콜렛>은 어떤 면에서는 아프리카(확장하자면 ‘국외적인 것’foreignness)에 대한 드니의 참을 수 없는 매혹이 중심에 있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화한 여느 백인 아이와는 달리 어린 프랑스는 프로테가 건네주는, 버터 위에 개미를 가득 바른 식빵도 덥석 잘 받아먹고 맹수의 습격을 당해 비참하게 죽어 있는 가축들도 신기하다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뻔히 쳐다본다. 프랑스의 그런 태도를 고스란히 체화한 영화는 호감이 담긴 시선으로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또 그런 장면으로 끝난다.

낯선 세계에서 발견한 짜릿한 관능성에 주목

드니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든 이후에도 계속해서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을 다룬 영화, 그렇지만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그들을 프랑스의 차가운 도시로 데려간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 후속작들인, 불법 투계(鬪鷄) 사업에 관여하게 된 두 흑인의 이야기를 건조한 톤으로 그린 <죽음은 두렵지 않다>(이 영화의 제목은 두 흑인 가운데 하나가 애지중지하며 훈련을 시키고 또 함께 의식(儀式)을 벌이는 싸움닭의 이름에서 따왔다)와 노파들만 골라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이자 게이바의 댄서인 한 흑인을 비롯해 크게 세 가닥의 스토리를 꼬아 가는 누아르풍의 영화 <잠이 오질 않아>는 <초콜렛>과 함께 흔히 식민주의와 그 여파에 대한 3부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전작에서와 달리 나중의 두 작품에서 고향을 떠나 이국(異國)의 낯선 도시에 불시착한 흑인 주인공들은 검은 대륙의 공기로부터 기원하는 듯한 일종의 고결함을 상실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그저 타락한 시스템에의 순응이 몸에 밴 또다른 ‘현대인’들일 뿐이다. 그러자 드니는 (흑인이라는, 또는 남자라는) 그 ‘낯선 세계’에서 다른 유의 매력을 찾아낸다. 그건 아마 그 ‘낯선 세계’에서 발견되는 짜릿한 관능성이라고 불러도 될 듯싶다. <잠이 오질 않아>에서 드니는 흑인 주인공인 카미유의 단단한 육체에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벗고 있거나 게이바에서 춤추는 그로부터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관능성을 찾아내서 기록해낸다. 이후로 여성의 눈으로 본 ‘낯선 세계’의 관능성이란 드니가 영화를 통해 포착하는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에 이른다.

<초콜렛>에서부터 드니 영화를 관통하는 또다른 주요한 특징 하나는 그녀가 이야기를 주조해내는 방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드니는 굳이 동기나 인과관계의 연결을 치밀하게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녀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대답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해답을 미루거나 방기한 채 그저 무언가 응시한 바들을 이어가는 식이다(그렇기에 <잠이 오질 않아>같이 크게 세명의 인물이 관련되는 대단히 ‘현대적인’ 이야기 구조에서도 세 인물들에 대한 터치들을 잇고 또 잇는 식이지 그로부터 아주 정교하게 맞물린 퍼즐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본 그 지속시간 동안만큼 인물들은 자신들을 드러내고 그들을 보는 관객은 관찰과 사고를 행하게 된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와 <잠이 오질 않아>처럼 현대 도시에서의 가혹한 삶을 그린 영화에서도 서정적 시정이 배어나오는 데에는 이런 ‘생략적인’(elliptical) 방법에도 적지 않은 공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 프랑스영화의 숨은 재능 클레어 드니 (1)

▶ 프랑스영화의 숨은 재능 클레어 드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