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외로운 남정네의 가슴팍을 꼬집고 때리고 할퀴며, 시원한 가을 바람은 여지없이 스쳐간다. 거리에 창궐하는 쌍쌍들의 행렬에 오늘도 가슴 가득 허전함을 안고, 그렇게 26해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봄날이 갔다고 슬퍼하는 이들은 알까나? 봄날이 오지도 않은 이의 아픈 맘을…. 이럴 땐 본디 가슴 따스한 사랑 이야기로 시리고 아픈 속을 달래줘야 한다.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
이처럼 시린 가슴을 급속히 데워주는 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일본 애니메이션 하면 떠오르는 인물, 미야자키 하야오. 그가 만든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1993년 TV영화로 만든 이 영화는 <마법의 천사 그리미 마미> <변덕쟁이 오렌지 로드> 등을 만들었던 모치즈키 도모미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일본의 모 잡지에서 연재되었던 인기 청춘물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코우치라는 지방도시에 전학온 어여쁜 소녀 리카코와 우리의 순진한 의리파 주인공 무토우. 그리고 리카코를 처음부터 사모했으나, 결국 아쉬움과 함께 친구 무토우에게 사랑을 양보하는 마츠노. 이렇게 세 인물을 중심으로 서로간 얽혀 있는 사랑의 실타래를 풀어간다.
모든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실사영화에서조차 보기 힘든 정밀한 일상의 묘사와 정성어린 땀내 가득한 화면들 위로 투명한 청춘들의 로맨스를 조심스레 담아낸다.
무토우는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집으로 향한다. 그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옛 고교 시절을 떠올려본다. 고교 2학년 시절 매미가 유난히도 울어대던 그날. 아르바이트를 하던 무토우에게 마츠노가 황급히 전화를 건다. 학교에 도착한 무토우에게 막 도쿄에서 전학온 리카코를 소개하는 마츠노. 무토우는 마츠노가 리카코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단짝친구를 뺏긴 것 같아서 섭섭해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
하와이로 간 수학여행에서 갑작스레 리카코의 부탁으로 빌려준 돈 때문에 그는 졸지에 도쿄에까지 함께 가게 되고, 거기서 함께 1박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무토우는 리카코를 이해 못할 건방진 아이로 보기도 하고, 때론, 이혼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리카코의 측은한 모습에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결국 그들의 도쿄여행이 학교에 알려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무토우와 리카코 사이에 여러 갈등들을 늘어뜨리며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모은다.
도쿄에서 온 도도하고 잘난 여자애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촌동네 남자아이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 큰 사건도 없다. 그리 직접적인 표현들도 없다. 그러나 도쿄에서 한밤중 무토우의 호텔 방에 들어와 울면서 갑작스레 무토우의 품에 안기는 리카코, 술에 취해 쓰러진 리카코를 위해 욕조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는 무토우의 모습 등엔 그들의 애틋하고도 귀여운 사랑의 모습들이 듬뿍 담겨 있다. 또한 영화의 극을 끌어가는 무토우의 회상과 내레이션은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처럼 처음엔 별로 행복스럽지 않은 일들을 나열하다가 이내 그 모든 것이 리카코와 무토우의 소중한 사랑의 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사람에게 자신의 맘을 전달하는 것만큼 힘든 게 있을까?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가 그의 사랑을 남들이 안 보는 먼지 쌓인 고서적 열람증마다 적어두었듯이 무토우도 자신의 사랑을 마츠노와의 우정으로 가린 채 꼭꼭 숨기고 있다가 훗날 학교를 졸업하고서야 자신이 진정 바랐던 것은 아름다운 경치를 리카코와 함께 보는 것이었다는 걸 늦게나마 깨닫는다.
혹자는 이런 사랑이 환상이며, 현실의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현실만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때론 꿈을 꾸는 게 행복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것도 재밌지 않은가?
가을이다. 맘에 두고 있던 고백의 말들, 그리고 마음들을 이 계절이 가기 전에 풀어봐야겠다.
그래서 나도 바다가…, 바다를 듣고 싶다.
민동현/ 단편영화 <지우개 따먹기> <외계의 제19호 계획>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