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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누군가 내 몸에 이름을 써준다는 것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 북>에서 ‘이름을 쓰는 행위’의 의미

‘필로우 북’은 고대 일본의 서책인 <마쿠라노소시>(枕草子)이다. 책의 저자는 헤이안 시대의 궁녀였던 세이 쇼나곤(淸少納言: 965-1010?). 그가 궁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어놓은 메모를 모아 만든 책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자신의 영화(1996)에서 그리너웨이는 곳곳에 이 책의 구절을 깔아놓는데, 그 인용구들은 쇼나곤의 섬세한 감성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오리알. 은그릇에 담긴 얼음 조각. 등나무 꽃. 눈 덮인 자두 꽃. 딸기를 먹는 아이들.”

쇼냐곤의 일기

영화는 주인공 어린 나기코의 생일의식으로 시작한다. 아빠가 나기코의 얼굴에 붓으로 이름을 써주며 고대의 전설을 들려준다. “신이 처음을 만들 때, 먼저 눈을 그리고, 입술을 그린 다음, 남녀를 구별하셨다. 그리고 각각의 이름을 쓰셨다. 당신이 만든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얼굴에 이름이 적힌 나기코가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아빠 이름은?” 아빠는 소녀의 목덜미에 제 이름을 적어 넣는다. “당신이 만든 것이 마음에 들면, 그 진흙 모형에 생명을 불어넣고,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으셨다.”

나기코의 인생을 지배할 또 하나의 원체험은 고모가 읽어주던 필로우 북. “너와 이름이 똑같은 나기코라는 여인이 지은 책이란다. 네가 스물여덟이 되는 해에 이 책의 나이가 꼭 천년이 된단다.” 영화 속의 내레이션은 천년 전 쇼나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글을 쓰는 것은 평범하면서도 고귀한 일입니다. 글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절망적일까요?” 여섯째 생일날 나기코는 자신도 언젠가 그런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나만의 필로우 북을. 나도 내 모든 연인들의 얘기를 쓰리라….”

나기코의 결혼은 곧 파탄이 났다. 남편은 나기코의 생일날 이름을 적어주지도 않았고, 그가 일기를 쓰는 것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남편이 일기장을 불태우던 날, 나기코는 집을 나와 홍콩으로 떠난다. 거기서 패션모델로 성공한 그녀는 진정한 연인이 될 제롬을 만날 때까지 제 몸에 글씨를 적어줄 남자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관계에 들어간다. 남자들은 그녀의 몸에 글자를 쓰는 저자가 되기도 하고, 그녀가 쓰는 글의 책의 페이지가 된다. 그녀는 남자들의 몸에 글을 써서 출판업자에게 보낸다.

프레임의 파괴

영화에서 당장 눈에 띄는 것은 독특한 형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파격이 디지털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점. 가령 그리너웨이는 소니 HD 기술을 이용해 영화에 멀티 프레임을 도입한다. 이는 윈도에 창을 여러 개 열어놓고 작업을 하는 상황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한 화면에 열린 다수의 프레임은 서로 지시하고 암시하면서 서로 상보적 관계 속에 들어간다. 이 프레임들의 인터랙티비티가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영화 매체의 선형적 흐름에 대위법과 비슷한 공간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프레임의 크기, 가로와 세로의 비도 수시로 변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리너웨이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20세기의 회화는 이미 프레임을 파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사진은 프레임에 둘러싸여야 한다는 600년 전의 지배적 관념, 즉 르네상스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 인터뷰에서 그리너웨이는 최근 20여년간 영화에서 동일한 것만 반복할 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프레임의 파괴는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화의 또 다른 형식적 특성으로 그리너웨이는 연속성의 단절을 든다. “서양의 이른바 지적(知的)인 영화조차 시작, 중간, 종결이라는 19세기 소설의 시간적 배열에 강하게 속박되어 있다.” <필로우 북>에서 플롯의 연속성은 수시로 단절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 결혼 시절의 기억, 홍콩에서 무명 시절의 기억, 천년 전 쇼나곤의 모습, 그가 쓴 필로우 북의 페이지 등이 현재의 사건의 진행 속에 수시로 끼어들면서 “경험의 파편화”를 수행한다. 영화에서 시간은 앞뒤로 흐른다. 시간은 공간이 된다.

상형문자

그리너웨이가 미술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화면에 넘치는 시각적 인용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국부를 가린 나기코의 손은 ‘비너스 푸디카’을 암시하며, 촛불 앞에 앉은 나기코는 조르주 들라 투르의 ‘막달라 마리아’를 직접 인용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도 문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이다. 서예(caligraphy)는 원래 ‘아름다운 (calon) +기록(graphy)’이라는 뜻이 아니던가. 그리너웨이에게 서예는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타고난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예이며, “영화를 재건축하는 탁월한 템플레이트”다.

서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바꾸어놓는다. 영화에는 잠깐 이슬람의 서예가 언급된다. 동아시아 바깥에서 글쓰기를 본격적인 예술의 장르로까지 발전시킨 것이 아랍 문명이 아닌가. 하지만 나기코의 욕망은 모든 글자를 예술로 바꾸어놓는 것. 그녀의 몸은 영어, 불어, 중국어, 아랍어 등 모든 언어를 이미지로 바꾸어버린다. 알파벳이라는 표음문자까지, 심지어 덧셈과 뺄셈의 수식까지도 이미지의 예술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의 피부 위에서 바벨의 언어는 아담의 언어로 변성된다.

<필로우 북>은 같은 해에 나온 또 다른 영화와 펜던트를 이룬다. <필로우 북>에 인간의 신체에 쓴 열세권의 책이 나온다면, <프로스페로스의 서재>에서는 마법의 힘을 가진 스물네권의 책이 등장한다. 서예는 철자와 숫자(alpha-numeric code)로 그리는 그림. 그것은 오늘날의 컴퓨터그래픽을 닮았다. 프로스페로스는 마법의 주문으로 무인도에 가상의 궁전을 창조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가상현실의 기술을 닮았다. 이렇게 내용의 측면에서도 그는 “영화를 재건축”하기 위해 디지털의 패러다임을 도입한다.

창세의 언어

상형문자는 창세의 언어이기도 하다. 영화는 일본의 고대 신화를 인용하나, 실제로 일본에 그런 신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속의 신화는 차라리 히브리 전통에 가깝다. 신이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선사하고, 거기에 각각에게 이름을 준다는 얘기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히브리의 전설에 따르면, 창세의 언어, 이른바 ‘아담의 언어’는 음성을 들으면 곧바로 의미가 떠올라 따로 배울 필요 없는 상형언어였다고 한다.

발터 베냐민은 어디선가 아담의 언어의 특성에 대해 얘기한다. 히브리 전설에 따르면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신의 입에서 나온 낱말이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일본 신화는 신이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전한다. “당신이 만든 것이 마음에 들면”이라는 아빠의 대사는,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바라보는 신의 감상을 연상시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베냐민에 따르면 최초의 언어는 “명명하는 언어”로, 그 언어의 어휘는 고유명사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바벨의 언어는 대부분 ‘개념’이라는 이름의 일반명사로 이루어진다. 개념은 개별자를 구별해서 불러주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일본의 신화에서 신은 자신이 만든 인간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써준다. 왜? “당신이 만든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여기서 명명 의식에 나기코가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 없이 그녀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각과 촉각

글쓰기는 청각을 시각으로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글자를 피부에 쓸 때, 글쓰기는 촉각이 된다. 그리고 그 종이의 냄새를 맡을 때 글쓰기는 후각이 된다. “종이 냄새는 모두 좋았다. 모두 살갗 냄새 같았다.” 청각과 시각이 후각과 촉각이 될 때, 글쓰기는 섹슈얼리티로 연결된다. 나기코의 글쓰기는 곧바로 성행위로 이어진다. 이 글쓰기의 쾌락은 그의 숙적인 출판업자에게서 변태적 유미주의로까지 발전한다. 그는 죽은 제롬의 피부를 떼어 만든 책의 냄새를 맡고, 그것에 제 피부를 갖다댄다.

나기코가 보낸 열세 번째 책은 머리에 꽂고 있던 칼로 출판업자의 멱을 딴다. 그렇게 찾아온 책(제롬의 피부)을 나기코는 본사이(盆栽) 밑에 심는다. 스물여덟이 된 그녀는 이제 자신의 필로우 북을 쓸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고 느낀다. “이제 나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을 열거할 수 있어. 산사에서 연인이 해주는 키스. 역사를 모방하는 한낮의 정사. 사랑하기 전과 사랑하고 난 후….” 그녀는 제롬에게서 얻은 아이의 얼굴에 이름을 적는다. “그가 만든 것이 맘에 들면, 그 진흙 모형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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