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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야, 광기의 포대에서 나오너라
2001-10-31

인간 내면과 중국 근대사를 종횡으로 오가는 시대극

● 전반적으로 강렬한 인물화 중심의 흑백사진과 다큐멘터리적 영상을 왔다갔다하는 <귀신이 온다>의 미장센은 특별한 주의를 끌지 못할 수도 있다. 바다를 향해 웅승거리듯 포복하는 자세의 중국 촌락은 그전의 영화들에서 익히 봐왔던 모습으로 별 감흥 없이 널브러져 있다. 오히려 그곳에서 좋아라 수영하는 일본 군인들의 모습은 일견 어린아이들의 장난 그것처럼 비쳐진다. 원탁회의를 하는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뿌연 흙먼지가 부유하는 강렬한 명암의 클로즈업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때론 비현실적인 인물화의 이미지로 화면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단 한 장면, 배고픈 일본군 병사 두명이 닭에 눈이 빨개져 마을로 들이닥치는 이 장면만은 예외이다. 이때 만리장성은 중국 촌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지막한 흙벼락과 그 높이나 크기에 있어 크게 차이가 없이 등장한다. 기적소리 드높게 일본군들은 삼단 허들 뛰어넘기를 하듯 가볍게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중국 인민을 가두고 닭 한 마리 때문에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중국이 오랫동안 믿었던 중화중심주의와 그들의 수호신 만리장성이 허망하게 자신의 자존심을 내어준 날. 그때 귀신은 왔다. 그리고 남은 것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불가해한 방법으로 남겨진 살의였고, 웃음과 울음의 희비극이 섞인 묘한 모양새의 우화였던 것이다.

귀신은 나로부터 온다

장원은 어린 시절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는데, 어른들이 해주는 귀신 이야기에는 영락없이 외국인을 귀신으로 묘사됐다고 한다. 한번도 세계의 중심이라는 위치가 흔들려본 적 없는 중국 인민들에게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순박한 인지상정의 산물이 귀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원은 중국인의 무의식 가장 깊숙이 자리한 만리장벽을 넘어온 이들 오랑캐들에게 일방향적인 시선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가장 저주의 말을 가르쳐 달라’고 한 일본군 포로에게 중국인 통역관은 오히려 ‘존경하는 어르신,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손주 인사드립니다’라는 축복의 말을 가르쳐준다. 중국인들에게 타자로서의 귀신인 일본군 포로 역시 자신의 세계 안에서는 중국 인민이 타자인 것이다. 그는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마다산과 마을 사람들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떤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 놓인 문화적 편견과 언어적 단절이 빚어내는 착종하는 유머로 관객의 배꼽과 들었다 놨다 하는 시소게임을 벌인다.

마다산과 하나야의 엎치락 뒤치락하는 권력의 반전과 인연의 희비극은 우여곡절 끝에 인민재판에서 그 끝을 보게 되지만, 마을을 접수한 뒤 무차별적으로 인민재판을 감행하는 국민당군도 중국 민초에게는 모두 똑같은 귀신일 따름이다(채널 브이의 진행자 오대위가 빤드름한 국민당 군의 장교를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그리고 중국인 내부 집단에서도 여전히 귀신은 존재한다. 일본군을 죽이지 못한 마다산이 마침내 자신은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고 대성통곡을 하자 그의 연인 유아는 “사람 죽이라고 해놓고서는 귀신 취급을 하냐?”며 마을 사람들을 힐난한다.

결국 귀신은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 게다가 귀신은 문지방 넘어, 즉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온다는 사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귀신이 온다>의 귀신은 나약함, 두려움, 삶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그래서 당연한 애착, 이런 무형의 것들이 만들어낸 유형의 개념으로 모든 편견과 자기 소외 혹은 증오의 실체로 몸을 부풀린다. 결국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자루를 놓고 간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나’이지 않았는가?

전쟁의 광기, 인간의 베일을 벗기다

<귀신이 온다>의 매력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전쟁의 광기에 의해 베일을 벗는 인간 본성을 세필로 그려내는 데 있어서 장원은 유머와 분노, 선과 악, 혹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무게중심추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무게중심추의 균형은 영화 형식이라는 측면에서도 세심하게 배려되어 전반부의 우스꽝스러운 우화적 톤에 충격적인 역사인식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장원은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지 않고도, 허허실실한 방식으로 중국의 근대사에 많은 말을 하는 것이다.

탁 트인 바다에서 왔던 일본군들은 ‘오직 하나의 태양’이라는 일본의 이미지와 걸맞게 대부분 대낮이나 환한 조명 속에서 등장한다. 늘 밤장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잘 찍은 흑백사진에서 막 걸어나온 사람들처럼 보이는 중국 인민들에 비해 이들 일본군들은 너무나 환해서 턱없는 허상의 너울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마다산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인 포로와 맺은 협약으로 인해 일본군 진지에 들어갔을 때, 도시와 진지는 첩첩의 성으로 막힌 위압적인 미장센을 드러낸다. 이후 마음속 허상의 귀신이 아닌 현실의 군인으로 돌아온 일본인들은 귀를 찢는 듯한 군가소리와 핸드헬드로 영화 속에 격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다. 소용돌이치는 대검처럼 중국의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내모는 일본인의 자살 콤플렉스와 집단주의의 광기는 바로 2차대전 와중에 중국 인민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역사의 참화였을 것이다. 그것은 5세대이든 6세대이든 중국의 감독들이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중국 근대사의 아킬레스건이 주는 통증. 화면 속에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격렬해질수록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린 평범한 인민들의 ‘혼란감’이 어느 정도의 강도였을 지는 극도로 분명해진다.

확실히 <귀신이 온다>의 초반부는 <붉은 수수밭> 이후 중국영화들이 보여준 중국영화의 원죄의식, 이데올로기의 지나친 선명성에 발목이 묶이거나 장대한 스펙터클의 서사에 목이 맨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귀신이 온다>의 초반부는 차라리 <붉은 수수밭>에서 진홍의 붉은 피를 탈색시켜버린 역사 시트콤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중국의 대표적인 스타에서 감독으로 변신한 장원은 베이징 잡초처럼 게릴라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지하 전영의 감독들과도 다르다. 그는 <햇빛 쏟아지던 날들>이나 <귀신이 온다>를 통해 자본주의에 밀려가는 중국의 쓸쓸한 시골길이나 상하이에 떠다니는 연인들의 이야기에 천착하지 않고도 6세대적인 감수성이 어떻게 역사물과 섞일 수 있는지를 몸소 실천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이념적 무게에 질식하지 않고 이를 살짝 비껴가는 가벼움, 역사를 다루면서도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세부를 놓치지 않는 장원만의 비기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당나귀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을 풀어준 대가로 곡식을 받기 위해 간 일본 병영에서 얼어붙을 듯한 긴장- 역사적 긴장이라고 하면 어떨까?- 을 일순간에 깨뜨리는 것은 바로 당나귀였다. 중국인들이 끌고간 당나귀가 일본군의 말을 덮친 것. 권력과 권위에 대한 이보다 신랄한 조롱이 있을까?

결국 달걀처럼 굴러다니던 목숨이 빙그레 웃음짓는 날, 그는 마침내 영겁 같은 이데올로기의 갈등에서 벗어나 해탈의 순간을 맞이한다.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일본군들에 복수를 한 뒤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 마지막 칼을 기다리는 마다산의 뒤에서도 역시 당나귀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마지막 말을 남기라는 주문에 자갈이 풀린 마다산은 마치 당나귀의 울음 같은 괴성을 내뱉는다. 당나귀같이 어리석은 세상에 해줄 말은 당나귀의 말밖에는 없다는 듯이. 그리고 도저한 역사의식에서 벗어난 짐승같은 분노의 울부짖음으로.

증오, 참혹한 중국 근대사의 대가

전쟁과 함께 황폐해져가는 마다산의 심성은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살의와 증오심이라는 귀신도 끄집어내고 만다. 장원은 평화롭고 무지했던 중국 인민들의 순박함을 갈가리 찢어놓은 역사의 대검, 즉 증오가 근대의 시기를 강제로 넘겨버린 중국의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한 대가였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루쉰의 유머감각과 쑨원의 역사인식을 겸비한 그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역사적 긴장에 심리적 여유의 방점을 찍어놓으려는 대담한 감독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귀신이 온다>는 중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배척받고 있다 한다. 중국 정부는 ‘일본을 미화하고 고의적으로 중국인들을 격하시켰다’면서 앞으로 7년간 장원의 감독활동을 정지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심층적으로 보자면 <귀신이 온다>의 어떤 면은 중국 정부의 비위를 거스를 만큼 은유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다. 유일하게 진상을 파악하고 흑과 백의 엄격한 논리로 적을 쳐부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실성했다고 취급받는 대목에 가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중국의 촌부들은 중국의 무의식적인 민족성 즉 허세와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들의 난국을 헤쳐나가려다 본 모습을 드러내며 자멸하고 만다. 반대로 일본의 극우파 역시 끝내는 잔인한 살인마로 표현된 일본군의 모습에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장원은 스스로 ‘내가 마다산이 된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지금 <귀신이 온다>는 영화에서처럼 흑과 백이 판치는 세상의 금들에 의해 무참히 오해되고 있다. 거대한 중국이라는 대륙의 타자로서의 귀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원. 그의 이러한 모습은 데뷔작 <햇빛 쏟아지던 날들>에서 남들 몰래 빈 방을 돌아다니며 사랑하는 소녀의 모습을 훔쳐볼 때부터 이미 예정된 운명인지도 모른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kss196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