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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니면서 젠체는
2001-10-31

바즈 루어만의 <물랑루즈>

● 열정이 크면 클수록 키치적이며, 키치적이려면 아예 심하게 키치적인 게 더 낫다. 20세기 전체를 그저 바보 같은 한곡의 사랑노래로 전환해버렸다 한들 뭐 어떠리? 그저 열심히 오버할 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바즈 루어만의 <물랑루즈>는 주류의 광기일 뿐이되, 그 광기는 잘 계산돼 교활한 광기다. 별것도 아닌 것이 대단히 잰 체한다.

엉망으로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노라면 다 썩어가는 호수의 흉측한 쓰레기가 생명체로 살아나 구역질나게 만드는 공포만화를 패러디했던 한 잡지가 생각난다. 영화를 뮤지컬로(그리고 한편으로는 <라보엠>으로) 되살려내려던 루어만의 집요한 시도는 그 잡지의 절반의 완성도조차 내놓지 못했다. 혼돈스러울 것은 거의 없는 채, <물랑루즈>는 적어도 100년어치는 될 온갖 쓰레기들을 게걸스레 빨아들인 진공청소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도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평온할 정도로 태연자약하다.

그래도 영사기를 멈춰버리고 싶어지기까진 시간이 좀 걸린다. 영화의 영리한 오프닝은 1900년대의 아슬아슬 연약한 트릭영화들과 오늘날의 디지털 묘기를 한데 섞으면서 관객을 단숨에 몽마르트르 뒷골목으로 날려보낸다. 진흙투성이에 연기 자욱한 파리는 <스타워즈>에 나올 법한 도시 같고, 모든 인테리어는 색종이 조각들과 디즈니 찌꺼기를 접목시킨 듯 반짝인다. 과장스런 울랄라 울랄라가 지나가면 <물랑루즈>는 진정으로 외설적인 외양을 약속하지만, 이것이 결국 갖다주는 것은 과장되지 않고 진부할 따름인 무대 뒤편의 로맨스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 <혁명의 아이들> <히어로스> 등 완전 분위기 다른 노래와 어울려 나오며 물랑루주 캉캉걸들이 ‘레이디 마말레이드’에 맞추어 춤을 추는 가운데, 성스런 샤틴(니콜 키드먼)이 나이트클럽 천장에서 내려오며 ‘다이아몬드는 여자들의 가장 좋은 친구’를 들려준다. 70년대 노래 제목들로 대사를 읊는 젊은 시인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은 엘튼 존의 <유어 송>을 통해 샤틴을 사로잡고 파리를 광명으로 밝힌다. <벨벳 골드마인>에서도 보여주었듯이, 이완 맥그리거는 강한 비브라토 음색을 갖고 있다. 비록 그의 페르소나가 늑대 같은 그의 미소로 자주 가려지긴 하지만. 물랑루주의 은밀하고도 강력한 섹스여신 키드먼은 피처럼 붉은 입술과 ‘슈콜라’로 알려진 검은 수호천사에 힘입어 그 창백한 아름다움에 빛을 더한다. 그녀는 영화의 잘 계산된 히스테리아 분위기에 아주 적절한, 차갑고 절제된 자세로 연기에 임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빚어내는 화학반응의 결과는 그저 뜨뜻미지근하며, 환각적인 스펙터클을 가지고도 <물랑루즈>는 대단한 것을 해내지 못한다. 스코어도 실은 별볼일 없다. 제대로 된 노래들이라기보단 그저 짧은 메들리들에 지나지 않는다. 루어만은 배우들로 하여금 미소짓는 얼굴을 영화 내내 카메라 가득히 드러내도록 고무하는 자신의 특기를 더욱 다듬고 세련되게 만들었지만, <물랑루즈>는 질투에 찬 분노와 신파조의 탱고를 몽타주하면서 장엄한 피날레를 예고하는 부분에 가서는 진짜 너무너무 끔찍해진다.

루어만을 중심으로 놓고 보자면, <물랑루즈>는 <댄싱 히어로>보단 참아줄 만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만큼 재미있지는 않다. 최근의 아방가르드 뮤지컬 <어둠 속의 댄서>는 관객이 사랑하거나 혐오할 만한 영화였지만, <물랑루즈>는 그저, 시니컬한 “그래서 뭐 어쩌자고?” 하는 물음이나 나오게 만드는 영화다. 하다못해 애들관객은 끌어당길 것인가? 만약 예고편을 봤다면 영화 다 본거나 마찬가지다. 이 겉만 번지르르한 싸구려 물건은 <앨리의 사랑만들기>의 어떤 에피소드보다도 말이 더 안 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구질구질한 가라오케를 담고 있을 따름이다.(<빌리지 보이스> 2001.5.29. 짐 호버만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짐 호버만/ 영화평론가·<빌리지 보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