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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의 한판 도박
2001-11-01

박진감 넘치는 법정드라마 <보스턴 저스티스>

법조문을 읽다보면, 이 세상에 외계인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들이구나, 싶다. 도저히 이해불능인 단어, 어디서 이어져서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는 문구. 팬픽션이 어렵다는 사람들이여, 법조문에 도전해보시라! 정말로 법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어려운 법조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외워서 활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변호사와 검사, 판사들이 벌이는 한판승, 바로 <보스턴 저스티스>이다.

보스턴에서 콩알만한 법률회사를 운영하는 바비 도널이 주인공으로, 심한 빈부차에 걸맞게 늘 사건이 끊이지 않는 보스턴에서 온갖 사건을 담당해나가는 것이 주요 플롯이다. 이 바비 도널을 중심으로 동료 린제이, 변호사라기보다는 범죄형으로 생긴 유진, 해박하고 냉철한 엘레노어, 늘 불안정한 지미, 자기 맡은 소임에 걱정걱정하다 늘 손해만 보게 되는 판사 헬렌 등을 중심으로 온갖 사건이 소송으로 이어진다. 1996년 처음 시작한 이 시리즈는 현재 미국에서는 시즌 6, 주한 미군방송에서는 시즌 5, 국내 케이블 채널에서는 시즌 1과 2를 볼 수 있었고 곧 새로운 시즌이 방송될 예정이다.

영화 <의뢰인>을 보면 주인공이 법률 드라마를 많이 봐서 법률 절차를 쉽게 이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만큼 미국 드라마에는 법정물이 많다. 그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보스턴 저스티스>가 유별나게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니라 도박성이다. 정말로, <보스턴 저스티스>는 도박성이 강하다. 사람들이 한 에피소드를 자꾸 보게 된다는 의미의 도박성이 아니라 마치 이 드라마 자체를 도박을 관전하는 자세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딱 시작하기 전에 돈 얼마씩 걸고 결말이 어떻게 나오나 봐도 될 정도이다. 도대체 이 난관을 바비 도널이 어떻게 헤쳐나갈까도 궁금하지만 정말로 궁금한 것은 어떤 판결이 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피말리는 순간은 나와 상관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법정인데 정의사회 구현에 필요할 것만 같다. 그래서 더욱더 방관자적 입장에서 이 도박을 즐길 수 있다.

사람 죽고 사는 일을 가지고 도박을 한다는 것에 약간의 도덕적 가책이 느껴지지만, <보스턴 저스티스>는 절대 그럴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하다 못해 범인 잡는 액션도 없는데 너무도 박진감이 넘쳐서, 보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법률드라마는 보통 판결만큼이나 질질 끄는 것이 특색이지만 <보스턴 저스티스>는 질질 끌지 않는다. 그냥 휘말려 들어가는 트위스터 같다. 그 휘말려 들어가는 파워는 롤러코스터에 버금갈 정도다. 이 드라마를 진행하는 실력과 잔재미는 모두, 제작 총지휘자이며 작가인 데이비드 켈리에게서 나온다. 이미 <시카고 메디컬>(Chicago Hope)로 이름을 날린 데이비드 켈리는 진짜 각본 쓰는 기계마냥 한 시즌의 80%가 넘는 대본을 혼자서 쏟아붓는다. 제작 총지휘자 데이비드 켈리의 역량은 정말로 대단하다. 실제로 법률 관련 종사자들이 <보스턴 저스티스>를 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한다. 실제로 저런 사건이 벌어지면 어떠한 법률에 근거해서, 어떠한 판례에 비추어 판단을 해야 할 것인가? 내용은 픽션이지만 정말 실제 판례에 근거한 판결이 나올 때마다 입이 따악 벌어지고 만다. 이른바 도박성이라고 표현한 박진감이, 바로 이 그럴듯함에 자리잡고 있다. 정말 현실적으로 부닥칠 수 있는 사건이기에, 궁금함이 증폭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현실감은 너무도 강력해서, 이미 정의실현이라는 명분은 저만치 내던진 상태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재판은 전부 이기느냐 지느냐의 약육강식이다. 제로 섬 게임이다. 옳다 그르다가 아닌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은 도박인 것이다.

이 <보스턴 저스티스>의 쌍둥이, 코미디 변호사 시리즈가 있다. 바로 <앨리의 사랑만들기>(Ally McBeal). 과연 누가 쌍둥이 중 사악한 쌍둥이(evil twin)가 될 것인가? 정말로 내가 본 크로스오버 에피소드 중 최고였다. 크로스오버 에피소드의 살아 있는 교과서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본을 쓰는 데이비드 켈리의 장점은 불행히도 드라마의 편파성으로 곧장 이어지고 만다. <보스턴 저스티스>야 원래 치졸한 세상을 그린다고 하지만 드라마 자체가 자주 (회를 거듭할수록) (심한 말로) ‘치졸’해지고 만다. 오로지 바비 도널이 최고여야 하고, 바비 도널만이 잘되어야 한다. 드라마 자체가 바비 도널의 치사한 변호사 짓을 ‘다 먹고살려니 할 수 없지’ 하고 감싸는 것이 보인다. 먹고살려니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못난 짓은 못난 짓이지 그걸 감싸는 것은 가진 자의 횡포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린다. 약육강식인 세상을 그대로 모사하다 못해, <보스턴 저스티스>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자주 따라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 바비 도널이 주변 변호사, 검사, 변호인, 안 가리고 속된 말로 ‘등쳐먹는’ 것을 보다보면, 아무리 잘생겨도 절대 변호사는 사귀지 말아야지, 싶다. :)

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