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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독립영화의 역사를 확인하라, 일본 언더그라운드 영화 걸작선
김도훈 2008-04-22

4월22일부터 5월12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

1960년대 일본은 고속성장의 시대를 맞이했다. 전후의 가난을 10여년 만에 벗어버린 일본인들은 이미 63년부터 세계 최초의 고속열차 신칸센으로 도쿄와 오사카를 출퇴근했고, 64년에 개최된 도쿄올림픽은 기적 같은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의 60년대는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제 목소리를 찾으려는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꿈틀꿈틀 시작된 시대이기도 하다. 영화 청년들 역시 변화에 목이 말라 있었다. 그들은 더이상 아버지(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했던 건 경제 발전의 뒤안길에서 비틀거리는 자신들의 마음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영화였다.

60년대 청년영화운동의 중심에는 일본 독립영화의 씨앗으로 평가받는 아트 시어터 길드(Art Theater Guild: ATG)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ATG는 독립예술영화를 위해 창립된 단체다. 스스로 메이저 스튜디오를 걸어나오거나, 혹은 애초에 메이저 스튜디오의 문 앞에 설 생각이 없었던 감독들은 ATG가 보유한 전국 10여개의 독립영화 상영관을 통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다. 오는 4월22일부터 5월12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에로스, 학살: 일본 언더그라운드 영화 걸작선’은 ATG가 제작하고 배급한 작품들과 그에 영향받은 작품 18편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기회다.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아우르는 이번 걸작선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이름은 이미 아트시네마를 통해 회고전을 가진 바 있는 와카마즈 고지다. 1936년생으로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 와카마즈 고지는 1963년 데뷔 직후부터 저예산 로망 포르노 장르에서 기묘한 걸작들을 만들었다. 많은 로망 포르노 감독들이 그랬듯이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 역시 섹스와 폭력이었다. 그는 강간과 죽음으로 얼룩진 청년들의 초상을 통해 경제적 동물들의 훈련소가 되어가던 전후 일본사회를 치열하게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

와카마즈 고지의 영화 중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은 <적군PFLP·세계 전쟁 선언>과 <가라가라 두번째 처녀>다. <적군PFLP·세계 전쟁 선언>은 지난 71년 칸영화제에 참가한 와카마즈 고지가 팔레스타인으로 숨어들어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활동을 기록한 선언적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이며, 69년작 <가라가라 두번째 처녀>는 청춘남녀가 아파트 옥상에서 만나 투신자살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는 실험적 극영화다. 전혀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진 두 작품은 당대 일본 젊은이들의 (내적, 그리고 외적) 투쟁의 흔적을 포효한다는 점에서 여전한 강렬함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적군PFLP·세계 전쟁 선언>을 좀더 흥미롭게 감상하고 싶은 관객이라면 올해 전주영화제 상영작인 와카마즈 고지의 신작 <실록 연합적군>을 이어서 관람할 것을 권한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공개되어 화제를 모았던 신작 <실록 연합적군>은 일본 학생운동의 종말을 알린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의 전후를 그리는 3시간짜리 대작이다. 와카마즈 고지는 내부 혁명에 성공하지 못한 채 스스로 괴멸해버린 청년운동의 폭력성과 순진함을 다큐멘타리의 필치로 재현하며 관객의 심장을 쥐어짠다. <적군PFLP·세계 전쟁 선언>과 <실록 연합적군>의 간극에서 와카마즈 고지의 지속적인 투쟁정신을 읽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이번 상영전에서는 와카마즈 고지의 작품 외에도 데라야마 슈지의 <전원에 죽다>, 아다치 마사오의 근작 <테러리스트> 등 60년대 전공투 안보투쟁을 다룬 작품들과 <미각형명론 사설>처럼 영화 매체의 실험을 단행했던 아방가르드 실험영화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다. 또한 익히 잘 알려진 하라 가즈오의 87년작 다큐멘터리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ゆきゆきて神軍)와 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평론가 정성일의 해설과 함께 상영된 마쓰모토 도시오의 <수라>도 다시 상영작에 포함됐다. 재활용의 미덕을 잘 보여주는 프로그래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