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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인 삶을 위한 스펙터큘라
2001-11-07

<물랑루즈>의 키치와 신파, 그 끝에서 진정성을 발견하다

● ‘<물랑루즈> 한번 써봐.’ 직장생활 말년에 몸조심하느라, 말없이 덥석 받아들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난호를 받아 펼쳐보니, 짐 호버먼의 비평이 있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영화평론가 중 하나이며, 도발적이면서도 세련된 뉴욕을 대표하는 평론가 짐 호버먼이 이미 <물랑루즈>를 처참하게 씹어놓았다니. 그뒤를 이어 또 <물랑루즈>를 비평하라는,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란 말 아닌가. 그 글이 실리는 줄도 모르게, 세상사에 무심한 탓으로 자초한 일이지만 하여튼 난감한 일이다. 씹자니 함량미달인 동어반복이고, 칭찬하자니 공력이 달리고.

<물랑루즈>가 호버먼의 표현처럼 ‘영사기를 끄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다. <물랑루즈>가 잡다한 것들을 쓸어모은 ‘쓰레기’라는 점에도 동의하고, ‘텅 비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일까.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 바즈 루어만처럼 ‘후안무치’한 것일까.

언젠가 케이블에서 여행 프로를 보다가, 화사한 호주의 풍경을 만났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호주 사람들의 특징으로 자연스러움과 격식없음을 들었다. 마침 축제장면에서 요트를 모는 사람이 반바지에 정장 상의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파티에 간다고 하는데 그런 요사스러운 복장을 하다니. 하지만 호주에서는 그런 모습이 다반사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호주인들의 그런 태도를 조롱하지만 호주인들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고도 했다. 묘하게도 호주영화를 볼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약간 뒤틀린 촌스러움. 영국의 펑크나 미국의 힙합처럼 주류에 노골적인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지만, 큰길에서 벗어난 약간은 조잡하고 투박한 골목길 이미지. 아니 소도시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세련되고 정교함을 자랑해도 호주영화에서는 어딘가 친근한 흙냄새 같은 것이 풍긴다. 심지어 <피아노>를 볼 때도 그랬다. 아마도 영어문화권의 변방이기 때문에 그런 ‘힘’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바즈 루어만의 데뷔작인 <댄싱 히어로>도 그렇다. 나오는 배우들도 촌스럽고, 그들이 연출하는 드라마도 사실 유치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 유치함을 한순간에 태워버리는, 강렬한 열정이 있었다. 호버먼은 <물랑루즈>에서 신파조의 탱고장면이 끔찍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전율을 느꼈다. 철저하게 장식적인 그 연출이 오히려 서늘했다. 나 역시 변방의 북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하게 내가 유치한 탓일까.

현실에 있는 <카바레>, 현실에 없는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이 자신의 영화를 ‘레드 커튼 시네마’라고 부른 것처럼, 그의 영화는 늘 ‘거짓’임을 강조해왔다. 연극적으로 과장되고, 화려하게 연출된 드라마를 통하여 어떤 자극을 주는 것. 드라마는 최소한 단순화시키고, 주변적인 장식으로 감정을 고양시키는 것. 그 전략이 절정에 달한 것은 그러나, <물랑루즈>가 아니라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영화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시를 읽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이틴의 사랑을 고전적인 시로 읊어대면서, 거기에 뮤직비디오처럼 현란한 영상이 시각까지 자극하는 순간 <로미오와 줄리엣>은 심장을 관통한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처절한 절규도 모두 장식일 뿐이지만 나의 눈과 귀는 그 순간에 멀어버린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아주 단순한 자극의 위대함을 일깨운다. 하지만 <물랑루즈>에서 샤틴이 죽어갈 때는, 그런 감흥이 일지 않는다. <물랑루즈>는 거대한 ‘스펙타큘라’일 뿐이다. 지난 100년간의 명곡이 익숙한 멜로디로 귀에 감겨들 때, 자연스럽게 우리의 감정은 물결친다. 눈으로는 ‘스펙타큘라’를 감상하며, 마음으로는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내고 있다. <물랑루즈>는 텅 비고, 현란한 가상의 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것이다.

전작들도 그랬지만 <물랑루즈> 역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다. 아니 그런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물랑루즈>는 모든 것이 작위적이고 시간은 멈추어 있다. 그게 힘인 동시에, 약점이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그림은 화려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까지 그러했을까. 바즈 루어만의 <물랑루즈>는 로트레크를 그저 사랑의 메신저, 서커스단의 난쟁이로만 그려낸다. 불쾌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안타까움은 있다. 보헤미안의 낙원이었던 파리의 몽마르트르 거리는, 몽상가들의 유치한 광기로만 그려진다. 크리스티앙이 보헤미안의 열망을 안고 파리로 왔다지만, 영화 속에서는 어떤 시대적인, 사회적인 풍경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그냥 단순한 배경으로 파리와 물랭루주와 계급을 노래한다.

그런 점에서 <물랑루즈>는 밥 포시의 72년작 <카바레>와 명백하게 다르다. <재즈의 모든 것>을 만들었던 거장 밥 포시의 <카바레>는 1930년대 베를린의 카바레 킷캣클럽을 무대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다. 라이자 미넬리가 미국에서 건너온 배우지망생 샐리 역을, 마이클 요크는 런던에서 온 양성애자 브라이언 역을 연기한다. 30년대의 베를린은 엉망진창인 곳이다. 경제는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치가 막 득세하는 중이다. 황폐한 베를린의 뒷골목, 계단을 내려가면 낯익은 환락의 도시가 열린다. <카바레>의 인물 구성은 <물랑루즈>와 흡사하다. 브라이언은 자유분방한 샐리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방해자가 나타난다. 독일의 귀족인 막시밀리안 폰 호이네. 막시밀리안은 돈과 세련된 매너로 샐리를 유혹한다. 샐리는 당연히 유혹을 받아들인다. 샐리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부유한 후원자가 필요한다. 자신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며 브라이언을 안심시키고, 샐리는 막시밀리안과 행복한 날들을 보낸다. 당연히 브라이언은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여기까지의 이야기 전개는 <물랑루즈>와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밥 포시는 바즈 루어만처럼 감각에 호소하지 않는다. 게다가 밥 포시는 진보적이고 세상에 대한 통찰까지 있다.

어느날 막시밀리안은 샐리와 함께 브라이언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브라이언까지 유혹한다. 세 사람은 서로서로를 사랑하는 기묘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샐리의 목적은 돈과 명예이고, 브라이언은 질투심을 다스리고 샐리의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막스밀리안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유혹한 것일까. <물랑루즈>의 공작이 원하는 유일한 것은 모든 남자들이 꿈꾸는 최고의 미녀를 손에 넣는 일이다.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무지몽매한 남성들의 유일한 욕망, 정복과 소유가 공작의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신화나 동화에서나 진리로 통하는 뻔한 이야기다.<카바레>의 막시밀리안은 어느날 편지 한통을 남기고 떠난다. 그동안 즐거웠다고. 막시밀리안은 샐리와 브라이언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목적 역시, 그들과 동일했다. 잠시 즐기는 것. 다이아몬드는 영원할지 모르지만 사랑은, 사람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 샐리와 브라이언은 충격을 받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엄혹한 세월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 그렇게 카바레 안의 풍경은 변함없이 흘러가지만, 카바레 바깥의 공기는 날로 험악해지고 있다. 거기에 맞춰 카바레의 불빛도 점점 어두워진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카바레>와 <물랑루즈>는 다르다. <카바레>에서의 실내와 실외는 서로의 거울 같은 관계다. 샐리는 무대에서 ‘머니, 머니’라고 노래부른다. 그녀는 현실에서 바라는 것을 무대에서 환상으로 보여주지만, 누구나가 ‘현실의 무게’를 강력하게 느끼고 있다. 짙은 화장은, 현실의 주름을 지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물랑루즈>는 중심을 비우고, 장식에만 몰두한다. 엘튼 존에서 너바나, <사운드 오브 뮤직>까지 쇼는 계속되지만 단 한번도 현실적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저 쇼일 뿐이다. 호버먼의 말처럼 ‘열정이 크면 클수록 키치적’으로 드러날 뿐이고, ‘태연자약’하게 모든 것을 낭비한다.

바즈 루어만은 인도에서 ‘원초적 코미디와 극단적 비극, 노래가 어울린’ 발리우드 뮤지컬에 현혹되었다고 고백했다. 극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노래가 등장하고, 황당한 코미디가 벌어지는가 하면, 스펙터클한 액션이 관객을 놀라게 한다. 발리우드 뮤지컬에는 대사가 별다른 필요가 없다. 바즈 루어만의 경험처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상황들은 천편일률적인 공식이고, 노래와 춤은 전형적인 사랑노래이거나 독백이다. <댄싱 히어로>에서 스콧 헤이스팅즈는 형식에 얽매인 볼륨 댄스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관객이 열광할 새로운 무엇인가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춤에는, 열정과 절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프란의 아버지에게 배우고 난 뒤에야, 그는 춤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바즈 루어만은 스콧의 각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느낌으로 배우고, 자신의 몸으로 보여줄 뿐이다. 바즈 루어만에게 현실의 깨달음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현실 자체가 바즈 루어만의 영화에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바즈 루어만 영화는 그저 거대한 쇼일 뿐이다. 그리고 쇼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 모든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원하는 한, 모든 남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원하는 여자를 원하는 한. 바즈 루어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속된 세계의 현란한 스펙터클만을 뽑아내서, 그가 연출한 무대 위 다른 공간에 펼쳐놓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과의 접점을 끊어버린다. 그 단절이 바즈 루어만의 세계를 더욱 감각적으로, 더욱 키치적으로 만들어낸다. 호버먼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키치에도, 키치의 진정성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바즈 루어만은 일관되게 키치정신으로 질주한다. 그러지않고 어찌 맨정신으로 <라이크 어 버진>을 공작의 노래로 재현할 수 있겠는가.

김봉석 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