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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여름은 지났지만
2001-11-08

30대의 사랑 신선하게 그린 <가을에 만난 남자>

매주 수·목요일 밤에 방영되는 MBC <가을에 만난 남자>(이창순 연출, 조명주 극본)는 연령상 386세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는 영광과 고뇌에 휩싸였던 거창한 과거가 등장하지도 않고, 가슴 설레는 신나는 ‘성공담’도 없다. <가을에 만난 남자>에는 ‘386’이란 거창한 언론의 수사를 뗀, 평범한 30대의 남녀가 등장한다.<가을에 만난 남자>의 소재는 무척 단순하다. 아니 진부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과거가 있는 남녀의 사랑에 재벌 홀아비의 등장. 산뜻함과는 얼핏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 드라마는 의외로 꽤 많은 마니아층을 양산하며 주목을 받고 있다. <가을에 만난 남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시청각적인 정갈함이다. 화면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계산한 듯한 화면, 어디서 찾았는지 눈에 쏙 들어오는 예쁜 장소들. 그리고 적절한 분위기에 맞춰 흐르는 세련된 음악들. 명품족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인터넷에 브랜드 이름과 가격 맞히기 경쟁까지 불러일으킨 이승연의 세련된 소품까지도 사회윤리적 거부감은 들어도 시각적으론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드라마의 특성이 이러한 감각적인 코드에 머물렀다면 <가을에 만난 남자>는 ‘트렌디 드라마의 30대 버전’이라는 폄하를 들을 수도 있다

정작 이 드라마에서 돋보이는 점은 수형과 은재, 윤섭이란 인물에서 엿보이는 절묘한 균형감각이다. 너무 지나치게 미화되지도, 반대로 너무 어둡지도 않은 황금분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승연이 연기하는 은재는 그동안 다른 드라마에서 접했던 이혼녀의 히스테리컬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 일에 욕심도 많고 그만큼 능력도 있다. 일상에 별다른 그늘도 없어 스스로 이혼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남이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사랑했기에 결혼했는데, 그런 사람과 헤어지는 게 간단한 일이냐”,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면 개나 소나 다 달려든다니까”라는 극중 대사에서 보듯 매사 당당한 그녀에게도 이혼은 훈장이 아닌 아픈 상처이다. 자유분방함이 돋보이는 수형 역시 마찬가지이다. 태어날 때부터 독신주의자인 듯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행동하지만 이혼한 이후에도 전처와 친구처럼 지내는 속내에는 결별에 대한 죄의식과 책임감이 배어 있다. 그러면서도 이혼에 대한 그의 가치관은 가부장제의 보수성을 지니고 있어, 종종 은재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극중에서 은재와 수형은 마치 헌 옷 벗어버리듯 과거를 훌훌 털고 편한 마음으로 데이트를 즐기지도 못한다. 즐겁게 만나는가 싶으면 자격지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마치 훔친 사탕을 먹는 아이처럼 불안해한다. 신세대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 모습이지만, 세상살이가 결코 순정만화나 로맨스 소설처럼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현실적이다. 이제는 어느덧 나이가 살짝 보이기 시작하는 이승연과 불혹을 훌쩍 넘어선 박상원이 다른 어느 출연작보다 이 드라마에서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이런 특성이 한몫하고 있다.

그리고 한명 더. 그동안 삼각 멜로물에 등장했던 중년 아저씨 중 가장 ‘귀여운’ 모습이라고 평가받는 이정길이 연기하는 윤재 또한 그런 균형감각의 산물이다. 자기보다 20년은 젊은 여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50대 장년의 재벌. 사람들의 뇌리에는 왠지 느끼하고 거북스러운 부조화의 관계가 떠오르지만, 드라마에서 이정길이 보여주는 모습은 정반대이다. 거울에 자신의 프로필을 비춰보며 조금이라도 배를 숨기려고 애쓰는가 하면, 은재의 감각에 맞추기 위해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법을 비서에게 배우기도 한다. 60년대 김승호가 연기했던 ‘로맨스 그레이’의 사랑이 왠지 측은지심을 자극했다면, 윤재의 모습은 그런 연민보다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하는 호감과 여유를 갖게 한다.

<가을에 만난 남자>의 시청률은 15% 내외이다. 흔히 말하는 대박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신세대의 호들갑스런 사랑 이야기에 질린 사람들에게 이처럼 신산한 사랑 이야기를 접하는 것도 가을날의 색다른 묘미 중 하나일 것이다.

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 oldfield@sports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