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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표현의 자유 논쟁 다시 불붙나?
이영진 2008-05-27

12회 인권영화제 거리 상영으로 현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에 이의 제기

집회신고서를 낸 영화제가 있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12회 인권영화제다. 초여름 열기를 식히면서 영화를 만끽하시라? 아쉽게도 관객을 위한 배려는 아니다. 심지어 인권영화제는 개막식이 열리는 5월30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관할 경찰서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인권영화제 김일숙 활동가는 “아시바(철골 구조물)를 쌓아 스크린을 걸 생각인데 첫날부터 충돌이 예상된다”고 말한다. 일몰 뒤 집회는 불법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라 오후 8시 이후 이뤄질 상영은 문화제 형식으로 치를 생각. 하지만 이 또한 걱정이다. 관련 구청에서 사전에 ‘절대불가’ 원칙을 여러 번 강조한 탓에 아예 신청서조차 내지 않았다. 이러다간 검문만으로는 모자라 공권력이 서준식 집행위원장을 구속했던 2회 인권영화제 때의 불미스러운 사태가 재연될지도 모른다. 영화제의 천국 한국에서 무슨 이유로 이처럼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는 것일까. 아니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추천을 받아 등급분류를 면제받으면 될 텐데 인권영화제쪽은 왜 ‘똥배짱’을 부리는 것일까.

“(영화업자는) 제작 및 수입한 영화에 대하여 그 상영 전에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등급분류를 받아야 한다.” 현행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 29조는 상영 전 등급분류를 의무화하고 있다. 단 “영진위가 추천하는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 등 몇 가지 경우에는 예외를 두고 있다. 영진위가 ‘보증’을 서면 영등위로부터 등급분류필증을 발부받지 않고 상영을 한다고 해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영진위는 이를 위해 ‘예술영화인정등에관한심의소위원회’를 두고 있는데, 해당 소위원회는 행사 주체가 적격한가, 행사 목적이 공공성을 담고 있는가, 행사 추진이 원활한가, 상영영화가 행사에 적합한가 등을 살핀 뒤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 결정을 내린다. 전년도에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을 받은 3년 이상 연속 개최된 영화제나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등의 기획전은 위원장의 권한으로 상영등급분류면제 추천이 자동발급된다.

사전심의 거부를 내세우며 대학가 등에서 상영했던 인권영화제가 일주아트하우스, 아트큐브, 서울아트시네마 등으로 둥지를 옮겨온 건 지난 2001년부터.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 위해 거리 대신 극장을 택했다.” 하지만 인권영화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영진위에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을 신청하지 않았다.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 자체가 사전심의에 해당한다고 판단해서다. 그렇다면 지난 7년 동안 영등위로부터 등급분류를 받지도 않고, 영진위의 등급분류면제추천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상영이 가능했을까. 해당 예술·독립영화 전용관들의 경우, 인권영화제의 취지에 동의하는 차원에서 휴관하고 극장을 내주는 등의 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올해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위험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극장들이 영진위 등급분류면제추천을 받지 않으면 대관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거두지 않았고, 결국 인권영화제는 공원에서 열리게 됐다.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을 둘러싼 옹호와 반론

여기서 한번 물어보자. 영진위의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영진위의 한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더 보장하기 위해서 만든 규정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1999년에 만들어진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 규정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싸움을 통해 검열 폐지를 약속했던 DJ 정부로부터 얻어낸 일정한 성과라는 것이다. 과거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일했던 이는 “영진위 내에 7인의 관련 소위원회가 있으나 이들이 영화를 일일이 보고 상영 여부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의 경우 줄거리 정도를 제출하는데, 이를 두고 “사전심의에 해당한다”고 보는 건 무리라는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의 한 관계자도 “영등위가 제공하지 못하는 공공서비스를 영진위가 제공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은 영화제가 상영작에 자율등급을 매기는 것을 뜻하는데 이 결과에 대해 영진위가 문제제기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 향유 측면에서 볼 때 영진위의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 또한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다. 현재 제한상영가 등급 논란을 둘러싸고 영등위와 수입사인 스폰지가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는 <숏버스>가 대표적인 예다. <숏버스>의 경우 언론에서 갈등을 다소 부풀린 측면이 있다는 반응도 있지만 지난해 영진위의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에 대해 영등위가 자신들의 “등급분류 판정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다. 대응방안을 논의하겠다”는 등의 가시돋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2001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상영작으로 발표됐던 <메조포르테>와 <카이트>가 “성적인 노출과 폭력의 강도가 높다”는 이유로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을 받지 못해 다른 작품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영진위의 상영등급분류면제추천이 “단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인권영화제 거리상영을 계기로 점화될 표현의 자유 논쟁

어쨌든 인권영화제의 거리상영 결정은 한동안 영화계에서 잠잠했던 표현의 자유 논쟁을 다시 촉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검열기구 대신 영등위가 출범한 이후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가 신장된 것도 사실이나 매번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에 막혀 법 개정 과정 등에 있어 언제나 미봉책을 추가하는 정도에 그쳤다. 행정기관에 의한 사전심의가 명백한 검열이라는 1996년의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영비법 관련 조항이 수차례 개정됐으나 “등급을 받지 않을 권리도 포함하는” 완전등급제 혹은 선택등급제의 실시는 언제나 장벽에 부딪혔다. 그 대신 등급보류, 등급거부, 제한상영가 등급 신설 등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반쪽짜리 법 개정이라는 비난을 들었던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4월23일 문화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영화인회의, 인권운동사랑방,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등 16개 단체가 ‘표현의 자유 확대와 영비법 개정을 위한 공동행동 준비위원회’(이하 공동행동)를 결성한 것도 지금껏 미뤄왔던 미비점들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영비법을 포함한 관련 법률을 검토해 표현의 자유 확보를 저해할 만한 독소조항들을 찾아내서 개선하겠다”는 것이 1차 목적이다.

5월21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개최된 ‘표현의 자유… 말하다!’라는 토론회가 원점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시 따져보자는 내용으로 이뤄진 것도 그 때문이다. 이날 토론회에서 이재정 변호사는 “등급분류의 경우 예외규정을 두고 있으나 유효적절한 보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추천을 받지 않으면 상영에 있어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고, 또 상영관을 확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관련 산업의 ‘진흥’을 위한 입법목적과 달리 현행 법률은 청소년 보호라는 가치를 더욱 우선하고 있다”며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 향유를 불가피하게 제한할 경우에는 예상되는 피해를 최소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행 법률이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률가로서 조심스럽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면서도 “시장성과 관계없는 비영리 목적의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 실험적으로 제작되는 창작물에까지 등급분류를 요구하는” 현행 제도는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영등위의 등급분류 기준도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박주민 변호사는 자세하고 친절한 해외 심의기준과 “매번 자의적이고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던” 영등위의 심의기준을 비교했다. 구체적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에 대해 영등위쪽은 그동안 “기계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반대의 뜻을 표했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는 “기준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경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질곡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나 이에 앞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의적인 공권력의 위험을 묵과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건국대학교 한상희 교수는 지난해 합헌 결정을 받았던 제한상영가 등급 기준을 문제삼았다. 그는 제한상영가 등급 기준 중 ‘반국가적’, ‘반사회적’ 영상물이라는 판단은 영등위가 아닌 사법적 판단이 요구되는 부분이라고 지적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보여져선 안 되는 불법적인 표현물과 어떠한 경우에도 보호받아야 할 유해한 표현물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과도한 민족주의나 지나친 국가주의를 유포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왜 제한상영가 등급을 매기지 않는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심의기구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시스템

4기 영등위가 출범하는 6월 말을 전후로 이 같은 논의는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외국처럼 등급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제공하는 내용 기술제가 확대돼야 한다.” “심의기준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위원회 연구 기능이 보강돼야 한다.” “전량 사전심의보다 자율 규제 및 사후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같은 요구들은 “표현의 자유밖에 모르는” 문화계가 아니라 “청소년 보호도 고려하는” 3기 영등위 위원들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들이다(<한국영화 동향과 전망> 2008년 4월호). 영등위가 차별적 규제보다 적극적 권고 기능을 강화하려면 일단 체질 개선부터 필요하다. 물론 단시간 내에 가능하진 않다. 대한민국예술원 등 특정 기관이 영등위 위원 추천권을 독점하고 있는 문제를 포함해 해묵은 숙제가 여러 꾸러미다. 이원재 문화연대 활동가는 “심의기구 구성에 있어 중요한 건 전문가를 모시는 게 아니라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전문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꼬집는다.

“표현의 자유는 그동안 허용된 영역만을 누리는 식으로 이뤄져왔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권으로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추구해야 하는지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이재정 변호사의 5월21일 토론회 발언 중 일부다. 이에 동의한다면, 영화계 안팎에서 다시 불붙기 시작한 표현의 자유 논쟁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진전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호시절”에도 불구하고 인권영화제가 일각에서 비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또다시 거리로 뛰쳐나온 것도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