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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새 타고 파스텔도원을 훨훨
2001-11-09

이성강 감독의 러브환타지 <마리 이야기>, 1998. 10 ~ 2002. 1

문득, 꿈을 꿀 때가 있다. 맑은 물이 흐른다거나 유난히 깨끗한 숲에 들어간다거나, 혹은 거기서 ‘꿈에서나 만날 법한’ 아름다운 이를 만나는 꿈. 그런 기억 하나쯤 있다면 어른이 된 뒤의 빛 안 드는 지하철역도 그리 텁텁지만은 않을 것이다. <마리이야기>는 어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젠 어른이 된 한 남자(아이) ‘남우’의 그런 오래 전 꿈 이야기다. 서울 도심에서 시작해 작은 바닷가마을로, 소년의 환상세계로, 그리고 다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는 <마리이야기>가 두어달 뒤면 세상에 나온다.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작품의 실체가 궁금해 작업실로 찾아가 미리 들여다보았다.

소리없는 화면에서 번져온 싸한 감동

“이렇게 열악한 곳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다니!” 누군가 <마리이야기> 작업실에 와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지만, <마리이야기> 팀의 작업실은 <마리이야기>의 어떤 풍경을 닮은 듯한 옥수동 한 귀퉁이에 자리해 있었다. 지상으로 난 지하철역사의 묵직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그늘을 만들어놓은 골목 입구. 그곳을 지나자마나 나타나는,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인 주택가. 어수선하고 외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학교를 파한 뒤 색색의 책가방을 메고 집을 찾아 걷고 있는 아이들이 평화로움을 불어 넣어 주는 골목. 지친 어른들의 도시 한 여백에 오래 전부터 있어온 아이들의 마을 같은 그곳에서 <마리이야기> 스탭들은 ‘나의 아름다운 소녀, 마리’를 찾아 오랜 시간을 컴퓨터 모니터 앞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직 소리가 입혀지지 않은 <마리이야기> 테이프를 보았다. 시나리오와 모니터 화면을 오가며 한 시간 반쯤 흘렀을까. 싸한 감동이 밀려왔다. 조용했기에 더 신기한 경험. 환상세계의 소녀 마리와 소년 남우의 러브 판타지라고 알려져 있던 내용은 그대로, 그런데 환상 못지않게 남우의 일상이 비중있게 담겨져 있는 게 새로웠다. 실제 풍경을 밑그림 삼은 배경그림들은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하고, 남우의 환상은 마치 ‘무릉도원’인 양 먹먹하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시적으로 묘사돼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은 파스텔톤의 색감이 현실에도 환상에도 잘 어울리는 빛깔을 입혀놓았다. 우선 3분가량 되는 긴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다. 새를 따라 서울의 하늘을 유영하던 그림이 한 빌딩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곧 남우가 옛 친구 준호를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이내 어린 시절의 회상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새처럼 유유히 환상 속으로 날아가는 구도의 <마리이야기>는, 작게는 뱃사람이었던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뒤, 바닷가 마을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소년 남우의 이야기다. 고양이 ‘요’, 친구 ‘준호’, ‘숙이’, 어머니, 할머니, 동네아저씨 경민 등이 그 삶의 풍경을 함께한다. 또다른 주인공 ‘마리’는 조금 천천히, 그러나 불현듯 남우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물고기와 새가 합쳐진 듯한, 상상의 동물 물고기새 한 마리가 남우의 책가방에서 튀어나오면서 서서히. 꿈인지 환각인지 모르게, 남우는 그로부터 몇번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보드라운 흰털로 뒤덮인 마리와 그녀의 구름처럼 큰 개를 만난다. 마리와의 만남은, 남우에게 그늘진 사춘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힘과 희망을 안겨준다. 마치 피곤한 날의 단잠처럼.

시작은 ‘하늘을 나는 원숭이’

‘그리움’이 주된 정조라 할 수 있는 <마리이야기>의 시작은, 1998년 10월로 거슬러들어간다. 그때, 이성강 감독은 서교동 주택가의 한 주차장을 개조해 ‘스튜디오 기시’를 꾸리고 있었고, 전승일, 조범진 감독 등을 비롯한 동료들과 2주에 한번씩 술잔을 기울이며 애니메이션의 꿈을 나누곤 했다. 그 무렵, “내가 만든 게 어디 들어 있나 사람들이 알기나 할까”, 단편애니메이션 상영회들을 다니다가 이성강 감독이 느꼈다는 작은 ‘불만’(?)이 사실상 <마리이야기>의 출발이다. “내 것만 여러 개 묶어 상영하면 어떨까” 하는 아주 사적인 바람에서 그는 일련의 ‘단편들’을, 옴니버스처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마리이야기>의 전신이라 할 만한, ‘하늘을 나는 원숭이’, ‘날개의 꿈’, ‘꽃’의 세 에피소드가 이성강 감독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탐험가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숲에서 몸이 털로 뒤덮인 신비의 존재를 만났던 일을 회상하는 이야기(‘하늘을 나는 원숭이’), 그 할아버지의 손녀가 공원에서 사슴을 만나는 이야기(‘날개의 꿈’), 할아버지의 죽은 할머니가 골목에 앉아 꽃을 팔며 전개되는 에피소드(‘꽃’). 이 얘기들의 시놉시스를 쓴 이성강 감독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옆집 고물상 아저씨에게 보여줬다. ‘언젠가 본 듯한 느낌’, 즉 기시감에서 이름을 딴 스튜디오 ‘기시’의 옆집 고물상에서, 시를 쓰며 살던 그 아저씨는 ‘하늘을 나는 원숭이’ 시놉시스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거 명작입니데이”라고. 그래? 그렇다면…? “이걸로 장편을 하면 괜찮겠다”, 그렇게 이성강 감독은 처음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품어버렸다. 그리고 그해 12월, ‘명작’ 시놉시스를 짧은 영상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을 포함해서 여섯명 정도의 인력으로 <마리이야기>의 첫 데모를 완성한 것은 이듬해인 99년 3월. ‘업계’에 몸담고 있던 조성원 씨즈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마리이야기>와 또 하나의 작품인 <소리의 방> 데모테이프를 처음 본 것도 그 무렵이다. ‘스튜디오 기시’ 이전, 그러니까 이성강 감독이 애니메이션 창작집단 ‘달’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미 그의 작업들을 눈여겨봤다는 조성원 프로듀서는, 단편애니메이션 이벤트 등을 통해 친분을 쌓은 사이였다. 데모를 본 그는 일주일 뒤, 이 감독을 찾아와 “이거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며 <마리이야기>를 골라집었다. 당시 <마리이야기> 데모는 ‘하늘을 나는 원숭이’에서 주인공이 환상 속 동물과 만나는 장면을 주로 묘사한 3분짜리 짧은 테이프였다. 이에 반해 이성강 감독의 또다른 장편 기획이었던 <소리의 방>은, 마찬가지로 3분짜리였지만 내용은 누드쇼를 하는 여자 소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었다. 조PD는 왜 <소리의 방> 대신 <마리이야기>를 택했을까. “<소리의 방>이 더 상업적일 거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마리이야기>에 더 끌렸다. 보통 애니메이션 하면 성인용, 아동용으로 구분지어 생각하는데, 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면 보통의 일반적인 영화관객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리이야기>는 보편적인 사람 이야기였다.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 당시의 선택에 대해 그는 이같은 심정을 들려준다.

“동화적인 느낌, 일상과 환상”을 한 품에

이성강 감독의 제목미정 ‘장편’ 프로젝트가 제작사를 만나 현실화 궤도에 올라선 뒤, <마리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몸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1999년 3월부터 2000년 7월까지, 1년4개월에 걸친 시나리오쓰기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작업은 세 이야기 중 두 번째는 빼고, 첫 번째 에피소드 ‘하늘을 나는 원숭이’와 세 번째 에피소드 ‘꽃’을 합치는 것이었다. 그랬다가 세 번째 에피소드를 마저 빼버리고 첫 번째 이야기만을 긴 이야기로 늘리는 2번째 작업이 시작됐다. 애초 ‘하늘을 나는 원숭이’는 탐험가가 숲에서 겪은 환상체험 이후, 긴 후사를 덧붙인 것이었다. 숲에서 나와보니 현실의 시간은 한참이나 흘러 있고, 전쟁이 벌어져 있고, 그 와중에 한 여자를 만나는데 그녀가 바로 숲에서 만났던 신비의 존재였다는 등등. 지금의 <마리이야기>가 나오기까지 고단한 첨삭의 과정에서 탐험가 대신 남우라는 인물이 생겨났고, 친구 준호, 숙이, 남우 어머니와 할머니 등 등장인물들이 속속 늘어났으며 배경 역시 산과 숲 대신 삶의 터전인 바닷가마을과 바닷속을 닮은 환상세계가 들어섰다. “동화적인 느낌, 일상과 환상”을 한 품 안에 끌어안겠다는 이성강 감독의 구상은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히는 것처럼 대단한 정신력을 요하는 일이었고, 작가 2명이 떨어져 나갔다. 3번째 작가이자 마지막 작가인 강수정씨가 비로소 호흡을 같이하게 됐다. “작가들이 시놉시스 무지하게 썼죠. 환상은 환상이되 어드벤처여서는 안 된다. 환상 속에 들어가서 뭘 하고 그런 것 없이, 자연스럽고 목적의식 없는 환상이어야 된다. 짧게 스쳐가면서 시각적인 느낌이 풍부한 그런 환상이어야 된다, 그러면서 또 현실은 구질구질하지 않게, 동화적인 느낌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죠.” 2000년 7월, 드디어 그 모든 느낌들이 담긴 시나리오가 탈고됐고, 바로 한참이나 기다렸던 콘티작업과 인물들의 연기 실사촬영이 이어졌다(배경이 산에서 바다로 옮겨진 데에는, 이성강 감독이 서울 홍은동의 절 백련사를 찾았던 경험이 주효했다. 언젠가 백련사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며 들었던 느낌, 바로 “저기쯤 바다가 있으면 딱 좋겠다”라던 느낌에 “그리기 더 쉬울 것 같아서(웃음)”라는 작은 이유도 작용했다고. “바닷가였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하면 좋을까” 했더니 한 친구가 동해안 감포를 말했고, 백련사 근처와 감포 바닷가는 <마리이야기>의 주요 풍경이 됐다).

<마리이야기>가 투자사인 무한투자금융기술을 만난 건 그보다 이전, 1999년 10월경이었다. 금강기획 영화사업부에 있다가 씨즈엔터테인먼트를 차린 조성원 프로듀서는 그 무렵 이야기를 하며 “투자자가 결정되기까지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영화투자하던 사람들이야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생소한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 같은 건 안 할 게 뻔했다. 그때 당시 한창 설립되던 벤처기업들에 눈을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속된 말로 잘 모르는 데를 꼬셔야지, 하는 생각이었던 거다. 바람을 많이 깔아놓았는데, 무한에서 먼저 연락을 해오더라.” 시운을 잘 타던 제작비 조달이 벽을 만난 건 제작기간이 길어지면서 순제작비가 17억원에서 21억원으로 늘어났을 때. 그때는 딱 한번 ‘큰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마리이야기>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투자사가 있는 와중에도 2000년 6월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돼 올 5월 3억원을 받았으니 말이다.

디지털 지운 디지털 화면

순제작비 21억원, 마케팅비 9억원, 약 30억원의 결코 작지 않은 프로젝트 <마리이야기>. 무엇이 이 작품을 한국애니메이션 기대작으로 손꼽히게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선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국내 작품으로는 처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본선에 올랐던 <덤불 속의 재> 등 자기색이 분명한 단편들로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이성강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 2D와 3D를 결합해 시각적 완성도를 높이는 작품이라는 점, 이야기 자체의 매력 등. 그중에서도 누가 봐도 아름다울 <마리이야기>의 ‘그림’은 중요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아서는 손으로 그린 것 같은 배경 그림들이 실은 모두 3D로 작업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림을 보고 난 내내 놀라움을 남긴다. 그것은 주도면밀한 작업에서 예정된 수순을 밟아 태어난 것. 실제 풍경을 사진으로 찍은 뒤 이를 바탕으로 3D작업을 하고, 그 위에 일일이 2D로 리터치를 한 결과다. 결국 3D의 편리함을 이용하면서도 섬세한 수작업을 통해 3D디지털애니메이션의 차가움을 거두어내고 손맛을 입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인물동화 부분에서도, <마리이야기>는 꼼꼼한 실사촬영을 통해 기본을 탄탄히 했다. 성인 역은 아마추어 연극배우들, 아역은 목소리연기를 하는 아역배우들로 하여금 인물연기를 하게 했고, 그것을 카메라로 기록하여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그리는 데 절대적인 참고로 삼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없는 것’에 대한 ‘판타지’ <마리이야기>의 작업은 이렇게 ‘이미 있는 것’을 모델로 이루어져 왔다. 모델 또한 멀리서 찾지 않았다. 고양이 요는 예전에 스튜디오 기시에서 키우던 고양이의 모습에서, 마리의 얼굴은 <마리이야기> 스탭 중 한 여자 애니메이터의 얼굴에서 따왔다. 사운드 역시 실제 바닷가나 길거리, 지하철역 등 ‘그 장소’의 소리들을 폴리로 녹음해, 마치 극영화의 동시녹음처럼 연출할 예정이라고.

98년 10월 이성강 감독의 첫 구상에서 시작된 <마리이야기>는 만 3년이 지난 지금, 이제 음악과 사운드작업, 크레디트 삽입과 최종편집만을 남겨두고 있다. 음악은 기타리스트 이병우씨가 맡아 작업중이고, 목소리연기는 이병헌, 안성기, 배종옥, 장항선, 그리고 아역배우인 이나리, 유덕환, 성인규 등이 캐스팅돼 녹음을 마쳤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기대해온 이성강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는 이제 약 2달 뒤, 내년 1월13일에 개봉할 예정이다. 애니메이션계의 ‘모범사례’라 할 만큼 착실히 단계를 밟아, 공들여 제대로 만들어진 작품. <마리이야기>가 기대했던 그대로, 많은 관객을 아름다운 꿈 속으로 초대해 주길 기대해 본다.

최수임 sooeem@hani.co.kr▶ 한국애니메이션의 신천지를 열어라

▶ 이성강 감독의 러브환타지 <마리 이야기>

▶ <마리 이야기>등장인물과 스탭

▶ 김문생 감독의 미래 SF <원더풀 데이즈>

▶ <원더풀 데이즈>등장인물과 스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