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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디스토피아! 아름다운 날들
2001-11-09

김문생 감독의 미래 SF <원더풀 데이즈>, 1995 말 ~ 2002 여름 제작기록

누구나 한번쯤은 소망한다. 비를 뿌리거나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 서서히 구름이 걷히는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청명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날을. 환경오염으로 황폐해진 미래의 지구에서 사라진 아름다운 날들을 꿈꾸는 사람들에 대한 SF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는, 애니메이션의 ‘원더풀 데이’를 기다리는 이들의 바람이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경쟁력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국산 장편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성공사례를 만들어보겠다는 ‘양철집’ 식구들의 한결같은 꿈 말이다. 인류의 유일한 터전으로 남은 남태평양의 시실섬, 인공 돔 안의 에코반과 그 외곽에 버려진 야성의 공간 마르의 대립 속에서 엇갈리는 젊은이들의 운명의 행방은 내년 여름이 돼야 알 수 있겠지만, 제작사 양철집을 찾아갔을 때 그들의 세계를 조금 엿볼 수는 있었다.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 입구에 위치한 양철집은, 이름 그대로 은색으로 빛나는 양철로 된 집이다. 시내 한가운데보다는, 인공도시 에코반 같은 미래적인 디자인과 원시적인 마르의 자연풍경이 공존하는 <원더풀 데이즈>의 한 장면에 갖다놓는 게 더 어울릴지 모를 만큼 초현대적인 느낌의 건물. 수십대의 컴퓨터가 제각각 공간을 차지한 이곳에서, <원더풀 데이즈>의 합성작업이 한창이다. 이미 촬영이 끝난 미니어처 세트와 매트페인팅, 실사영상, 3D 컴퓨터그래픽과 2D 셀캐릭터까지 다채로운 질감의 그림들이 한 장면에 잘 녹아들도록 붙이는 과정. 올 겨울에서 내년 여름으로 완성 시기를 늦춰둔 김문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1캠프와 2캠프를 지나 마지막 빙벽 앞”에 와 있는 셈이다. 하긴, 1년에도 십수편씩, 15년간 260여편의 CF와 무대 영상을 만들어온 김 감독이 <원더풀 데이즈>에만 매달려온 지도 벌써 4년째니까.

`아름다운 날들`을 위한 6년간의 기다림

살아가는 동안 ‘원더풀 데이’가 결코 쉽게 오지 않듯,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는 참으로 지난한 기다림이 필요했다. 황경선 PD가 김 감독에게 <아름다운 이야기-원더풀 데이즈>란 가제가 달린 영화 시놉시스를 보여준 것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95년 말. 당시 코래드에 몸담았던 황 PD와 이경학 PD는 <헤어드레서>를 끝내고 새 작품을 위한 시나리오 검토에 한창이었다. 읽어보고 자문 좀 해달라는 황 PD의 말에 환경이 파괴된 미래의 지구, 남태평양의 가상의 섬 시실로 이주해간 인류의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을 때만 해도, 실사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 하면 좋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을 뿐 자신의 작품이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4∼5년 전부터 혼자 시나리오도 써보고, “도대체 내 아이디어가 영화 같지 않아서” 고민하곤 하며 늘 영화를 하고 싶어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김 감독의 말을 듣고 정말 애니메이션으로 개발해보면 어떠냐는 두 PD의 제안을 받고 반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농담은 점점 현실이 됐다. “미대 시절의 작가로서의 느낌도 다 잃고, 제품만 보고 살면서” 과연 어떤 영화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온 그에게, ‘원더풀 데이즈’는 매력적인 화두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 결국 누구나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원더풀 데이즈, 아름다운 날들….” 제목에서 받은 느낌을 영화로, 그것도 실사와 다른 애니메이션의 미감으로 살려보고픈 의욕이 <원더풀 데이즈>의 긴 항해에 닻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일상이 아닌 여행지의 풍광처럼 낯선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새로움을 고민하던 김 감독은, 뜻밖에 가장 익숙한 것에서 해답을 발견했다. 그림과 갖가지 오브제, 미니어처 같은 복합 재질과 2D와 3D,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 등 지금껏 광고에서 다져온 다양한 기법의 실험. 2D 셀캐릭터와 3D 컴퓨터그래픽 소품, 미니어처 세트와 매트페인팅, 실사를 합성함으로써 본 적 없는 이미지의 질감을 빚어내겠다는 <원더풀 데이즈>의 스타일은 김 감독의 배경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게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제 일보에 불과할 줄이야.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그림으로 미장센을 만들고 때깔을 내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만, 영화는 일단 드라마가 탄탄해야 한다는, 시나리오에서 잡아내지 못한 건 그림으로도 못 잡는다는 생각 때문에 시나리오는 점점 손때만 묻어갔다. <원더풀 데이즈>의 기본 줄거리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에 떠밀려 시실섬으로 이주한 인류의 미래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 델로스에 의해 관리되는 에코반은 선택받은 소수의 인공낙원. 에코반의 수뇌부는 마르 지역을 희생시킬 음모를 꾸미고, 마르의 사람들은 공해가 사라진 뒤의 푸른 하늘, 곧 ‘원더풀 데이’를 꿈꾸며 델로스를 파괴하고자 한다. 마르 청년조직의 수하와 에코반 자위대의 제이와 시몬, 서로 다른 두 집단의 대립 속에서 유년의 추억을 공유한 채 엇갈리는 세 젊은이의 갈등과 사랑이 <원더풀 데이즈>를 끌어가는 주축이다. 여러 작가들과 함께 수십번 이야기를 고치고, 제작팀을 꾸리는 사전준비에 보낸 시간만 거의 2년. 다행히 진이 빠지기 전인 98년 상반기에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의 공동개발사업으로 선정되고, 뒤이어 영화진흥위원회의 하반기 영화판권담보 제작비 융자대상에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 오르면서 각각 3억원씩을 지원받아 데모 제작에 나설 수 있었다.

부푸는 기대, 바닥난 제작비

3분 남짓한 첫 데모가 완성된 것은 99년 3월경. <공각기동대> 등 일본애니메이션의 질높은 하청작업으로 이름난 DR무비와 DNA, 페이스 같은 유능한 3D업체들 등 기존 애니메이션업계가 가세한 첫 데모의 완성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실사로 찍어서 디지털로 덧칠한 하늘의 미묘한 색감, 미니어처 세트에 선 셀 질감의 제이를 향해 날아온 컴퓨터그래픽 도끼가 실사 영상의 벽에 박히는 이미지는, 적어도 전체 작품을 끌고갈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미완성이지만 미래적인 도시 디자인과 원시적인 자연이 공존하는 암울한 영상도, 역동적인 액션을 잡아내는 영화적인 카메라워크나 현대적이면서도 민속적인 정서를 풍기는 음악도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줬다. 전부터 입소문이 나 있던 <원더풀 데이즈>는 이 데모를 전후해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그해 10월 밀라노에서 열리는 영화견본시 MIFED에서 대만의 CMC그룹과 미니멈 개런티 30만달러에 판권 계약을 맺으며 시장에서도 일단 합격점을 받았다.

머릿속의 그림을 영상으로 펼쳐보이고, 세간의 인정도 받아 가장 행복했을 것 같은 이 반년 정도의 기간은, 그러나 가장 불안한 한때기도 했다. 데모를 만들고 팔린 것까진 좋았는데, 애초 20억원대에서 36억원선으로 불어난 제작비 조달의 걱정이 닥친 것이다. 미니어처 세트는 모션컨트롤카메라를 빌려 찍어야 하고, 셀은 셀대로, 컴퓨터그래픽은 컴퓨터그래픽대로 작업하는 등 갖가지 기법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하나로 조합하는 데도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독, PD 할 것 없이 양철집 내부 인력들은 전부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이 처음인데다가, “신기술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완성이 안 됐다는 의미”라는 김문생 감독의 말대로 이제껏 본 적 없는, 그러니까 한 적도 없는 작업에서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1년 이상 이 작품에 전념해야 하는 제작여건 등의 이유로 데모에 참여했던 애니메이션업체들도 빠져나가 제작팀을 재정비해야 했고, 무엇보다 이때까지도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낯선 그림도 10∼20분 지나면 눈에 익기 시작하고, 그 다음부턴 낯선 기법이 아니라 빈 곳이 보이는데….” 1달에 CF를 1∼2편씩만 하면서 만들면 되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접은 지 오래. 초기에 투자받은 종잣돈도, CF로 모은 돈도 바닥난 상태였다. 투자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MIFED 이후의 약 3개월 동안은 월급 주기도 힘든 고비였다.

가우디에서 탈출까지, 문화의 경계 지우기

이쯤 되고보니, 정말 대만에 판권을 미리 팔지만 않았어도 접어버렸을지 모른다는 황경선 PD의 말도 무리가 아니다. 들인 돈보다 들일 돈이 배 이상인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동료이자 남편인 김문생 감독을 볼 때마다, 괜히 CF로 잘 나가던 사람 고생시키는 길로 떠민 거 아닌가 후회도 막심했다고. 그러던 11월에 투자 유치를 위해 삼성벤처투자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영상팀 김성용 차장의 첫마디는 “전 애니메이션에 투자 안 해요”였다. 데모와 시나리오를 건넨 지 15분 만에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던 마음이 어땠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원더풀 데이즈>의 데모와 시나리오를 처음 본 김 차장의 생각은 “테크놀로지는 좋은데 시나리오가 개판”이라는 것이었다. 시나리오를 덮는 순간 뭔가 신선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투자를 결정할 순 없는 일이었다. 얼마 뒤 김 감독과 술을 진탕 마시고 얘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신뢰를 가지기 시작했지만, 투자를 결정한 것은 그로부터 약 3개월 뒤인 2000년 2월이다. 11월부터 시나리오를 계속 고치기 위해 이따금 설악산에 가곤 하던 김문생 감독은 그때도 설악산에 있었고, 미국 출장을 다녀온 날로 그를 찾아간 김 차장은 투자를 확정지었다. 조건은 시나리오를 끝까지 고칠 것과 명목상이 아니라 실무 PD를 맡아 같이 가겠다는 두 가지. “보통 사람들이 생각 못하는 범상치 않은 세계를 보는 눈이 있다”고 느낀 감독에 대한 신뢰가 투자의 가장 큰 이유였다.

또한 김 차장이 40억원대의 예산을 60억원대로 올리면서 다른 투자자를 떨치고 삼성벤처투자의 전액투자를 추진한 데는, <원더풀 데이즈>를 확실한 해외시장용으로 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어차피 40억원대의 애니메이션도 국내시장에서 투자액을 회수한다는 건 어불성설. 차라리 투자를 좀더 하더라도 해외시장에서도 경쟁력 있는 질을 뽑아내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이 점은 <원더풀 데이즈>의 제작진도 처음부터 신경쓴 부분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 스페인의 성가족교회나 구엘공원 같은 가우디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에코반과 레비우스의 해체주의 작업이 모티브가 됐다는 마르의 배경, 이미지가 보기 좋아서 활용한 탈춤과 사자놀이 등이 공존하는 전체적인 디자인과 캐릭터, 복합적인 기법까지 꼭 해외시장을 겨냥한 때문만은 아니지만, 모든 게 퓨전에 가깝다는 점에서 문화적인 이질감은 없는 편이다.

“애니메이션 기법을 쓴 영화” 만든다

올해 완성한 두 번째 데모를 보자면 해외시장의 꿈이 그리 허황되진 않다는 조심스러운 예측이 가능하다. 첫 데모가 다양한 기법이 조합된 영상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7분 남짓한 두 번째 데모는 암울하면서도 매력적인 스타일리스트의 면모가 엿보인다. 3D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바이크를 타고 에코반으로 가는 황량하고 기나긴 도로를 질주하는 제이의 오프닝부터 화사한 색채의 그래픽 문양을 활용한 이국적인 바 댄서의 환상, 제이와 수하가 맞닥뜨리는 박물관장면에 꼼꼼하게 채색된 스테인드글라스, 미니어처 세트에 실사와 3D를 가미한 입체적이고 웅장한 공간 등은 애니메이션의 분방함과 실사의 중량감을 모두 잡아내겠다는 제작진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지태, 우희진, 정준호의 목소리연기를 선녹음하고 그 뉘앙스를 참고해가면서, 애니메이터들이 6mm카메라로 자신들의 연기를 촬영해가면서 그려낸 인물들의 액션도 꽤 사실적이다. 제작이 지연된 덕분에(?) 최근에 개발된 파나비전의 새 렌즈나 세계에 몇 대 안 된다는 소니 HD카메라 등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원더풀 데이즈>의 영상에 힘을 실어줬다. “애니메이션 기법을 쓴 영화”라는 감독의 말대로, 데모에서 보이는 영상은 실사영화 이상의 실제감과 독특한 질감을 담보하고 있다. 지난한 고비를 넘겨온 제작진은 물론, 투자를 결정하고도 수없이 불안했다는 김성용 차장도 데모를 본 뒤로는 걱정을 덜었다고. 지브리스튜디오의 스즈키 도시오나 <타인들>의 프로듀서 등 일본과 미국의 제작자들에게도 개인적으로 보여줬을 때 반응이 좋았던 것도 제작진을 고무시키고 있다.

이미 감독이 쓴 것만도 100고는 넘을 거라는 시나리오는 이제 대사를 정리하는 막바지 수정 작업 중. 2D 작업과 합성 작업이 끝나면 후시 녹음과 원일씨의 음악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첫 데모부터 벌써 4년째 함께하고 있는 원일씨는 오케스트레이션과 샘플링, 수십종의 타악기와 민속악기 및 전자음악을 활용해 이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음악을 작업중이다. “더이상 삼성도, 양철집의 작품도 아니다. 이게 잘되면 다른 작품들도 힘을 받겠지만, 잘 못되면 향후 4∼5년간 다들 힘들어질 텐데 잘돼야지.” 정말 아주 소박하게는 <원더풀 데이즈>의 데모가 보여준 것 같은 낯설고 매력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주는 괜찮은 국산 장편애니메이션 하나가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지난하게 오랜 숙성의 과정을 거쳐온 <원더풀 데이즈>가, 끝까지 잘 익은 완성도와 함께 국산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운 시절을 열어준다면 금상첨화일 테고 말이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이혜정hyejung@hani.co.kr ▶ 한국애니메이션의 신천지를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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