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들은 더디 죽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인의 육체가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간 뒤에도 그 육체가 투영된 영화배우들은 여전히 살아 있지요. 어차피 관객에겐 셀룰로이드에 투영된 그림자로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니 마지막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는 그들은 죽은 게 아닙니다. 고로 히스 레저도 저에겐 아직 안 죽었어요. 영화관에는 <다크 나이트>의 필름들이 맹렬히 돌아가는 중이고 테리 길리엄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아직 개봉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계산해보면 그는 심지어 죽은 뒤에도 성장하는 배우입니다. 지금까지 히스 레저의 연기를 본 사람들 중 그가 <다크 나이트>에서 보여준 연기를 예상했던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다크 나이트>의 연기가 놀라운 건 그 영화에서 레저가 선보인 조커의 이미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히스 레저의 이미지와 거의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레저가 한 가지 종류의 캐릭터만 연기했던 건 아닙니다. 날건달 호주 청년에서부터 금지된 사랑을 하는 게이 카우보이, 심지어 카사노바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그는 꽤 넓은 영역을 탐사해왔죠.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이미지는 쉽게 정리되고 구분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가지고 있는 호주 남자의 스테레오타입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어요. 단순하고 과묵하고 종종 수줍으며 덜 때가 묻은. 사실 라세 할스트롬이 히스 레저를 카사노바 역으로 캐스팅한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이런 정반대되는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캐스팅하면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저항이 많이 죽거든요. 그건 그의 첫 할리우드 대표작인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다크 나이트> 이전 히스 레저가 보여준 연기 중 성공적인 작품들은 대부분 그의 이미지와 일치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브로크백 마운틴>이죠. 거의 농담처럼 들리는 ‘게이 카우보이’라는 표현이 영화가 끝날 무렵에 너무나 절실하고 당연하게 다가왔던 것도, 레저의 존재감 때문이었습니다. 연기도 물론 좋았지만 그만큼이나 레저라는 배우가 가진 기존 이미지의 활용이 적절했지요. 에니스를 연기하면서 레저는 영화 내내 수다스럽게 떠들지도 않고 자신의 속내를 관객에게 숨기지도 않지요.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면서도 과묵하게 그 비밀을 타인으로부터 숨길 수밖에 없는 남자의 금지된 사랑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라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가 자연인 배우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사람이란 나이를 먹고 새로운 경험을 쌓으면서 성장하고 변화하지요. 종종 자신이 전혀 몰랐던 면을 인생 경험과 다른 사람과의 교우를 통해 발견하기도 합니다. <다크 나이트>도 그 과정이었을 겁니다. 일단 레저의 캐스팅은 정반대 이미지의 배우를 기용해 의외성과 사실성을 추구하는 정석적인 시도 같습니다. 논리적이기도 해요. 웃는 얼굴로 분장하는 이유는 그 분장을 하는 사람이 웃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이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 당연한 아이디어는 놀랍기 그지없죠. 조커의 캐릭터에 이 접근법을 써도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걸요. 마찬가지로 전 레저 역시 조커 역을 하면서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거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다크 나이트>는 레저에게 엄청난 기회였을 겁니다. 그게 배우로서건, 성장 가능성이 열려 있는 20대 청년으로서건 말이죠. 한번 크게 도약한 사람은 이전의 보폭을 고수한다고 해도 같은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다크 나이트> 이후의 레저를 볼 수 없는 건 그래서 슬픈 일입니다. 이런 영화는 결코 한 배우의 유언이 되어서는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