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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안식월과 3주간의 여행
박혜명 2008-09-12

만 5년을 근무하고 안식월을 얻었다. 안식월이란 한달간 출근하지 않고 월급날에 월급을 받는 것을 뜻한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애타게 기다렸다. 안식월이 내게 오면 단 하루도 헛되게 보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 다짐이 너무 굳세었던 탓인지 나는 (지금 돌이켜봤을 때 약간 내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무리한 일정을 짜게 됐다. 필리핀에 계신 큰이모 댁에서 두주를 보낸 뒤 후배가 지내고 있는 밴쿠버로 곧바로 날아가는 여정이었다. 밴쿠버에서는 캐나다 로키 투어 일정을 중간에 끼워넣기까지 했는데 그것이 뭔가 대단한 의미와 계획 속에 나온 건 아니었고, 그 후배와 얘길 나누다 지나가듯 나온 거였다. 일정은 그렇게 완성됐다. 나는 7월25일 필리핀으로 출국했다가 8월8일 오전 인천에 입국해 입국 절차를 밟고, 그 자리에서 다시 체크인 수속을 밟은 다음 출국 절차를 거쳐 밴쿠버행 오전 비행기를 타기로 돼 있었다. 7월24일 목요일, 늦은 마감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머릴 써봐도 한여름 우기철인 필리핀에서 지낼 짐과 조석 일교차가 10도차 이상인 밴쿠버에서 지낼 짐과 험한 등산을 감행해야 하는 로키 짐을 모두 한 가방 안에 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짐을 나눴고, 필리핀으로 먼저 떠났다.

그러고서 8월7일 저녁, 나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평화롭고 따뜻했던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날(8월8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이모와 상의하던 중에 전화가 왔다. 밤 9시. 엄마였다. “내일 아침에 공항에서 아빠랑 만나는 거지?” “아뇨, 난 내일 비행기 타니까 모레 나오셔야 하는데….” “네가 8일 아침이라며.” 필리핀 출국 날짜를 하루 뒤로 착각하고 있었음을 그때 깨달았다. 짐을 싸기 시작했다. 3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다행히 도착했다. 나는 죽다 살아난 심정으로 비행기를 탔다.

그러고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 기내에서 두번 기절했다. 기내식을 먹고 잠들었는데 현기증과 울렁증 때문에 잠을 깼다. 속을 게워야겠다 싶어 일어나 화장실로 가다가 복도에서 쓰러졌다. 인천에 도착해서 엄마한테 증세를 얘기했더니, 급체한 거라셨다. 안심하고 아빠를 만났다. 캐리어 두개를 공항 야외주차장 바닥에 늘어놓고 짐을 잘 나눈 다음 아버지와 다시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고서 지갑을 잃어버렸다. 밴쿠버 티켓을 끊고, 휴대폰 자동로밍 절차를 밟고 나서 그걸 알았다. 내가 가진 돈은 1800원이 전부였다. 소화제 살 돈도 못 됐다. 탑승구 앞에 앉아 엄마와 통화하는데 목이 멨다.

그러고서 비행기를 탔다. 베이징 경유 비행이라 베이징 공항에서 5시간을 버텨야 했다. 냉방은 너무 과했고 나는 필리핀에서 몸살감기에 걸린 터였고,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실 돈도 없었다. 올림픽 개막날임에도 황량한 공항 한구석을 찾아 의자에 누워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가끔 일어나 책을 읽었다.

그러고서 밴쿠버에 도착했다. 후배의 연락처는 잃어버린 지갑 안에 있었다. 후배에게 연락할 길이 없어 공항 안팎을 휘젓고만 있는데, 전화를 받았다. 후배였다.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해 미안하다며, 많이 기다렸냐고 물어왔다. 이튿날, 나는 무사히 로키로 떠났다. 그 여행에서 내가 본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장엄하고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3주간의 시간을 나는 과연 단 하루도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