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아가씨 vs 건달
미적 방종을 경계함
2001-11-14

성과 폭력을 얽어놓은 <피아노 티쳐>, 아저씨를 불편하게 하다

●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됐다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노 티쳐>를 남산의 한 시사회장에서 봤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 여우주연상(이자벨 위페르), 남우주연상(브누아 마지멜)을 받았다는 영화다. 국내 개봉 날짜가 많이 남은 듯해 좀 망설였으나, 그냥 눈 딱 감고 이 영화를 건드리기로 한다.

<피아노 티쳐>의 배경은 오스트리아의 빈이다. 한 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사인 에리카는 제자들에게 잔혹하고 엄격하다.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뜬 채 사람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그녀는 차갑고 단단한 완전주의자다. 40대 중반의 이 고집스러운 여성은 고독하다. 그녀에게는 친구도 애인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용암을 감추고 있는 얼음이다. 그녀의 마음은 끓어오르는 정열로 달아 있다. 그 정열은 ‘비틀린’ 성적 취향의 회로 안에 있다. 에리카는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시내의 섹스숍을 순례하며 관음증을 만족시키고, 욕실에서 자신의 국부에 상처를 내며 희열을 느낀다. 그녀는 일상적으로는 사디스트고 성적으로는 마조히스트다. 그녀에게 반해 제자가 된 청년 발터는 자기 선생의 성적 취향을 알고 역겨워하지만, 어느 순간 야비한 감정이 폭발해 그녀를 두들겨패고 강간한다. 물론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폭력적 조롱이다. 모욕감을 느낀 에리카는 발터를 찌르기 위해 부엌칼을 숨기고 연주회장엘 가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자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그녀는 아마 죽을 것이다.

이 영화는 130분짜리였는데, 나는 내내 지루했고 틈틈이 불편했다. 영화를 함께 본 직장 동료는 내게 이 영화가 얼마나 빼어난지를 납득시키려 했지만, 나는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다만 에리카의 황폐한 내면을 이자벨 위페르가 훌륭하게 해석해냈다는 데에만 동의했다. 이 동료는 줏대없이 젠체하는 사람이 아니니, 이 영화가 칸에서 대접을 받았다고 점수를 더 준 것은 아닐 터이다. 결국 내 미적 안목이 너무 범상한 것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은 극단적인 섹슈얼 그로테스크리까지를 포함해서 내가 소심해 실천하지 못하는 온갖 종류의 성적 모험에 열려 있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서 결혼적령기에 이른 한국 미혼 남녀의 절반 가까이가 애인과의 섹스비디오 촬영에 긍정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나는 놀라지도 않았고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피아노 티쳐>에서 불편했던 것은 그 소재가 아니라 그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구체적으로, 성을 악착같이 폭력과 관련시키는 감독의 신경증이었다.

하네케 감독의 작품으로 내가 이전에 본 것은 <퍼니 게임> 한편뿐인데, 그 영화야말로 정녕 불편했다. <피아노 티쳐>에서 내가 느낀 불편함은 <퍼니 게임>의 낙진인지도 모르겠다. 두 건달이 휴가 온 가족들을 감금하고 모욕하며 하나하나, 지긋지긋하게, 악착같이 살해하는 스토리를 통해 감독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북한의 예술계에서 흔히 강조된다는 ‘긍정적 모범에 의한 감화교양’을 두둔할 만큼 내 미감이 순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예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이런 ‘퍼니게임들’이 미적 방종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정서를 충격하지만, 그리고 그 충격은 더러 폭력적이지만, 그런 폭력적 충격은 정신의 더 높은 고양에 기여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내가 지금 오버하는군!).

<피아노 티쳐>의 원제는 La Pianiste다. 프랑스어로 여성 피아니스트라는 뜻이다. 오스트리아 감독이 만든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오스트리아 사람이지만, 배우들은,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프랑스어를 한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드라마에서 일본 사람들이 한국어를 하듯. 그리고 <벤허>나 <쿠오바디스>에 나오는 고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이 현대 영어를 하듯. 물론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드라마에서 거리의 간판들이 일본어이듯, <피아노 티쳐>에서도 글로 쓰여진 것들은 다 독일어고, 등장인물들이 노래를 할 때는 독일어가 튀어나온다(그 노래가사 가운데 기억에 남는 구절들. “나는 왜 남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숨어 있는 길을 찾는 걸까.” “내 욕망은 헛되고 고되구나.” 아마 슈베르트가 하이네나 괴테의 작품에서 뽑았을 이 구절들이야말로 우리 에리카의 테마일 것이다).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 들롱과 마리 라포네가 영어로 말하는 걸 보고 신기해했던 적이 있다. 혹시 프랑스어판 영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것은 영어판이었다. 그 영어판 영화에서도 톰(알랭 들롱)이 친구로 가장해 마르주(마리 라포네)에게 쓰는 편지는 프랑스어로 돼 있었다. 이런 불일치는, 예컨대 <피아노 티쳐>에서 말은 프랑스어로 하고(물론 이 영화에서 프랑스어는 독일어로 간주되는 것이지만) 노래는 독일어로 하는 불일치는, 크게 흠잡을 일은 아니지만, 그 순간 리얼리티의 밀도를 추락시킨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 효과로 나를 영화라는 가상현실에서 끄집어내며, (비판적 거리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졸리게 하는 것이다.

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