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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의 애수, 따라지의 지리멸렬
2001-11-14

밑바닥 친 인생들 삶 그린 2편의 한국영화

● 가을 충무로, 풍년은 풍년이로되 곳곳에서 쪽박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기대했던 영화들이 조폭과 킬러의 협공에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나둥그러지고 있다. 페인트가 마르기도 전에 간판을 내릴 지경이면 참패보다 압살이라는 험악한 표현을 하는 편이 낫겠다. 줄초상난 작품들은 관객의 뒷골을 쑤시게 할 정도로 심각하거나 진지하지도 않았다. 재미와 의미가 균형을 이뤘는데도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으니 어디서 어떻게 해법을 찾아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정치판처럼 ‘민심이반’이나 ‘언론환경’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인가.

흥행 실패의 원인으로 홍보와 마케팅문제를 지적하지만, 전국을 돌며 무료 시사회를 열었어도 아무런 약발을 받지 못했다. 사상 최대의 입소문 전략을 내세웠다 낭패를 당한 쪽은 ‘공짜와 모르쇠’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볼 만하다. ‘권장운동’에 ‘제발 부탁하오니’ 투의 하소연을 보태고 ‘진실한 영화가 죽을 수는 없다’는 비장함까지 내비치며 이삭줍기에 나서지만 그마저도 힘겨워 보인다. 관 속에 누운 작가주의와 저예산영화는 이제 뚜껑에 못박힐 일만 남았다. 계속 헛다리를 짚은 제작자와 저널과 평단은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노래한 <세상만사> 가사대로 ‘이러구러’ 살아갈 뿐이겠다.

흔들리고 떠밀리고 닮아지고

그놈의 ‘대박 귀신’이 얼을 빼놓는 바람에 한국영화의 전통인 리얼리즘이 몸둘 바를 모르고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라이방>을 올해 한국영화의 재산목록으로 올리고 싶은 이유는, 세상을 말 그대로 가장 현실적인 삶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무대와 땡볕과 택시기사 등 전혀 서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소재들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시대 주변부의 중년 사내들이 흔들리며 떠밀려가고 닳아지는데, 그들이 겪는 녹작지근한 무력감과 쓸쓸한 비애감은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스타는커녕 낯익은 얼굴도 내세우지 않거니와 컴퓨터그래픽이며 카메라의 요란한 기교에 빚지지도 않은 작품들이지만, 신인들의 빼어난 연기가 영화의 완성도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떠돌면서 시들고, 시들면서 떠도는 게 인생이 아닐까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그렇게 질문을 던지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열고 닫는다. 무대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는 남자와 무대에 불현듯 나타나 노래하는 여자의 모습에서 유랑의 삶, 그 존재론적 우수가 읽힌다. ‘고추아가씨 선발대회’나 회갑잔치에 불려다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가 수안보의 와이키키 호텔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나훈아에게 화와이와 사이판 아가씨들의 갈채가 있다면, 너훈아에게는 부곡 화와이와 일동 사이판 아줌마들의 박수가 있다. ‘모조 인생’에 합류한 성우가 이러구러 살아간다고 자조하는 순간, 그의 10대 시절이 스냅 사진사의 플래시처럼 터진다.

인생이 한권의 책이라면, 청춘은 그 첫 페이지라고 했다. 짝사랑에 가슴앓이를 해도 기타만 잡으면 세상만사 걱정없던 시절이었다. 성우가 이끄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유래를 더듬어가는 과정이 완만한 리듬을 타는데,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회상 시퀀스엔 중년 관객이 배시시 웃을 만한 에피소드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전에 별 의미도 없는 목욕탕장면을 수상쩍게 잡은 카메라는, 성우 패거리들이 긴 해변을 벌거벗고 달리는 장면을 부감으로 담아내면서 현재로 진입한다. 여성감독의 장난스럽고 상투적인 감수성에 눈을 흘길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크레인숏은 후반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3류 보컬 성우와 과부가 된 야채장수 인희가 등을 보인 채 강가에 앉아 있다. 망각의 뿌리를 흔들며 흘러가는 강물이다. 그들은 무엇을 씻어 바다로 가져가주길 원했을까.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고요와 애잔함이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시간의 물살은 성우를 더 깊고 매섭게 휘감아버린다. 드러머 강수는 마약에 빠져 팀을 떠났고, 바람둥이 오르간주자 정석은 성우를 무대에서 밀어낸다. 또다시 출장밴드로 추락한 상우와 우 선생이 거리에서 황량한 인간 풍경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된 우 선생은 미래의 성우가 투영된 캐릭터인데, 그가 피난 시절이며 여성편력 따위를 들먹여도 진부한 감상주의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김영수의 자연스런 연기 때문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채택하고 있는 대비법은 다른 영화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임순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통스런 부대낌을 유연하고 깊이있는 성찰로 관객의 마음속에 인각시켜준다. 고정된 상태의 카메라가 긴 호흡으로 구성한 프레임은 지금, 이곳에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냉철한 응시의 자세다. 가슴 밑바닥을 치던 애잔함이 룸살롱장면에 이르면 한없이 막막한 슬픔으로 바뀐다. 고문보다 더 끔찍한 폭력을 참아내는 상우에게 아직도 꿈이 남아 있을까. 그의 풀려버린 눈동자는, ‘이것은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친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궁지에 몰린 남성들에 대한 임순례의 엄격한 사실주의 화술은 남자감독들을 뺨친다. 한마디로 괴력이다. 음악과 그림이 이토록 즐겁게 동업한 적은 드물다. 음악은 줄거리를 이끌어가거나 인물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더러는 그들을 에워싼 배경을 상징하기도 한다. 절제력이 아쉬운 부분은, 상우 친구인 시청 직원을 자살로 몰아가는 대목이다. 한국사회를 읽기에는 드라마의 톤이 너무 튀는데다 대사가 직설적이어서 울림의 여백을 남기지 못한다. 불구자로 처리했던 정석을 막판에 다시 무대에 올리는 것도 당혹스럽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모조리 잊혀진다. ‘당신 때문에 행복할 것’이고 ‘사랑밖에 모른다’고 노래하는 인희의 모습이 어둡게 멀리 사라진다. 몽롱하고 처연한 엔딩이다. 루카치가 그랬던가. 길은 끝났고 여행은 시작되었다고.

웃음에 묻어나는 현실의 무게

레이벤과 라이방의 차이는 와이키키와 수안보의 간극에 버금간다. 그 명칭들은 진짜와 가짜, 고급과 싸구려를 의미한다. 지금은 소설가로 유명해진 저널리스트 김훈이 소개하는, 라이방에 얽힌 천상병 시인의 일화가 흥미롭다. 어느날 천상병이 시 지망생에게서 싸구려 선글라스를 선물로 받았다. “여름에 선글라스를 끼어보니까, 머리를 뚫어버릴 것처럼 맹렬하던 그 잔혹한 햇빛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순해지고, 이 세상이 살기에 알맞은 온도와 습도 속에서 부드러워진다. 선글라스 참 좋다. 좋아.” 라이방 선전에 열을 올리는 천상병의 얼굴은 행복,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섬뜩한 라이방은 화사한 봄날 군화발로 민주주의를 접수한 박정희의 라이방일 것이다. 중앙청 앞에서 잔뜩 위압적인 폼을 잡은 박정희에게 라이방은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라이방>에서 분신처럼 라이방을 걸치고 다니는 학락도 라이방을 쓰면 숨어 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땡볕 세상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늘을 찾아나선 세 사람의 이야기는, “인간은 행복이나 불행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행복이나 불행은 인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못 철학적인 명제를 던지면서 시작된다.

불행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40대를 눈앞에 둔 3명의 택시기사다. 자랑거리라곤 베트남전에 참전한 삼촌 이야기밖에 없는 홀아비 학락은 다 자란 외동딸을 입양시켜야 할 정도로 무능력하고, 연변 처녀를 사랑하는 해곤에겐 연적으로 등장한 칠순 노인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유일하게 대학물을 먹은 준형은 남의 식탁에 공깃밥 하나 시켜 빌붙어 먹는 짠돌이지만, 망나니 형 때문에 집안이 콩가루가 될 형편에 놓인다. 카메라가 선풍기의 움직임을 따라 느리게 이동하면서 사내들의 수다와 푸념을 담아내고 있다.

삶은 나날이 지리멸렬해지는데, 실패 전문가답게 세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약은 척하다가 더 약은 사람에게 나가떨어지고, 정직하고 건실하게 살려다 오히려 배반당한다. 감독은 개탄스런 시대풍조를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희화적으로 그려진다. 현실을 다루면서 재미를 주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부지런한 똥개가 따뜻한 똥을 먹는다”, “최규하가 우리나라 대통령 맞긴 맞아?”, “여자의 얼굴은 현찰이고 마음은 어음이야” 같은 대사들이 폭소를 끌어낸다. 꼬일 대로 꼬여 부스러지는 사내들의 이야기가 쉴새없이 웃기는 데도 억지스럽거나 공허하지 않은 것은 짙은 페이소스와 함께 현실의 무게까지 달아내기 때문이다.

불행은 질긴 것이어서 열패감으로 밤을 맞고 허풍으로 아침을 여는 사내들을 끝까지 따라붙는다. 더이상 굴러떨어질 데도 없는 그들이 극단적인 탈출구를 찾는다. 클라이맥스는 철저하게 <죄와 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칫하면 어설픈 복사판이 될 위험도 있었으나, 패러디로 변형함으로써 영화는 긴장과 탄력을 얻는다. 심리전을 전개하는 듯한 이 대목은 배우들의 연기가 단연 돋보인다. 연극 무대서 오래도록 훈련을 쌓은 덕분인지 캐릭터들이 싱싱하고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이따금 덜컹거리는 드라마 운행이며 정비공과 경리사원의 로맨스는 지적받아 마땅하다. 지나친 희화화는 경박함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낮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형을 피해 준형이 어린 아들과 골목에 나란히 앉아 이를 닦는 모습은 장현수의 이전 작품에선 상상조차 못할 장면이다. 액션 연출이 체질화된 감독이 따라지 인생들의 애환을 그리는 일은, 역기 선수가 마루운동 선수로 전환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낙관주의자로 돌아온 장현수는 권태롭고 무료한 삶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연민을 자아내는 에피소드와 디테일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영화에서 감독의 나이를 읽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그늘은 바로 당신 곁에 있다”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마음을 찌른다.

박평식/ 영화평론가 jeruel@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