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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의 ‘사람들’이 네 번째로 다다른 지옥문 <이리>
이영진 2008-11-12

대사 & 카메라 이동 지수 ☆ 잿빛 도시 생생 재현 지수 ★★★☆ <중경> 관람욕 자극 지수 ★★★★

장률의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산다. 기댈 곳을 찾다가 뺨을 맞고 조롱당한다. 또다시 배회하고 끝내는 도망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혹독한 ‘망종’을 뒤로하고 가까스로 ‘경계’를 넘었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추방자라는 낙인과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률의 ‘사람들’은 그래서 또다시 휘청거린다. 쉴 곳을 찾다가 아랫도리를 약탈당하는 상황에도 처한다. 어찌할 수 없다. 넋을 놓고 떠돌 수밖에는. <중경>에 이어 개봉하는 <이리>는 <당시>의 아파트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장률의 ‘사람들’이 네 번째로 다다른 지옥문이다. 베이징과 몽골과 충칭을 거쳐 익산으로 흘러든 장률의 ‘사람들’에겐 어떤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까.

소도시의 중국어 학원과 경로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진서(윤진서). 30년 전 대형 폭파사고의 여파로 정신이 성하지 않은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하춘화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주워들은 ‘니 하오마’를 중얼거리며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이다. 언제나 방긋하는 그녀의 친절을 그러나 이곳 남정네들은 철저히 유린한다. 한편, 택시 운전을 하는 진서의 오빠 태웅(엄태웅)은 앞가림 못하는 동생 때문에 안절부절못한다. 셈 못해서 지갑을 통째로 건네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유산으로 번번이 하혈하는 진서 앞에서 그는 말을 잃는다. 커피 심부름을 대신 갔다가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태웅은 특별한(?) 복수를 감행한다.

<이리>는 반쪽 영화다. 한주 전에 개봉한 <중경>을 보지 않으면, 재중동포 장률 감독이 왜 굳이 1977년 한국의 이리역 폭발사고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제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느끼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시간(폭발)의 앞과 뒤, 전과 후를 다녀가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이 두편의 영화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은 두개의 장소 때문이 아니라 두개의 시간 때문입니다. 이제 겪어야 할 시간을 이미 다른 한쪽은 겪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겪은 것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을 때, 나는 이제 겪어야 할 쪽을 보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씨네21> 637호, 영화평론가 정성일, 장률 감독의 신작 <이리> 촬영현장에 가다)

감독의 말처럼, ‘중경’의 사람들과 ‘이리’의 사람들은 같은 운명의 시간축 아래 놓여 있다. ‘중경’ 사람들은 미래에 저당잡혔고, ‘이리’ 사람들은 과거에 고착됐다. ‘중경’의 ‘쑤이’가 매춘을 원하는 남성들의 흥정을 받아내는 난간 뒤의 화려한 시가지와 ‘이리’의 진서가 첫 번째 하혈하는 다리 뒤의 황폐한 역사 풍경은 놀랍도록 겹쳐 보인다. 오지 않은 시간들과 이미 지나버린 시간들 사이에서 현실은 항상 ‘끼인’ 상태다. 그 안에서 더럽혀진 장률의 ‘사람들’에게 허락된 것은 낮은 신음과 비명뿐이다. 고철을 줍는 쑤이의 아버지는 과거로의 회귀로 다가올 시간들을 지연시키려 하고, 미니어처 만들기에 심취한 태웅은 미래의 환상으로 지나온 시간들을 망각하려 들지만 모두 무용하다.

‘이리’는 단 한번의 폭발로 사라졌다. 지명 또한 익산으로 바뀌었다. 폭발 직전의 중경 또한 이태백이 노래하던 그곳은 아니다. 흉포한 도시의 유령 앞에서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계시 따위는 정치와 종교의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이리>의 마지막 장면. 진서는 애타게 기다리던 새 중국어 선생님 쑤이와 마주친다. 영화에서 둘의 대면은 불가능한 바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어이 장률 감독은 두 사람의 마주침으로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다. 쑤이와 진서의 마주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두 사람의 눈빛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분노와 희망이 읽히는가. 어쨌든 장률의 ‘사람들’은 고단한 도피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진 벗어남이야말로 장률의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의지이니까 말이다.

TIP/ <이리>의 남매가 사는 아파트는 익산 모현아파트. 이리역 폭발사고가 있었던 다음해에 건설된 30살 먹은 오래된 아파트다. 시나리오의 엉킨 매듭을 풀기 위해 2007년 초 익산을 방문했던 장률 감독은 이튿날 기차 선로가 내려다뵈는 모현아파트를 발견하고서 곧바로 촬영장소로 ‘찜’했다고.

윤진서가 말하는 <이리>

장률 감독의 현장 제일주의는 배우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경계>를 찍을 당시 장률 감독은 배우 서정을 초원 한가운데 던져두고 가버렸고, 일주일 뒤 퀭한 몰골의 주연배우를 두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촬영에 들어갔다. <이리>의 윤진서는 어땠을까. “오라고 안 하셨는데 제가 먼저 3일 전에 갔어요. 원래는 더 빨리 가고 싶었는데 <비스티 보이즈> 촬영 때문에 그렇게 못했어요.” 윤진서는 “사람은 적응동물이고, 배우는 더더욱 그렇다”며 “영화에 따라서 이전에도 종종 촬영장에 미리 내려갔고 그곳의 기운을 수혈받았다”고 말한다.

“<이리>는 표현이 절제되어 있어요. 그래서 기운을 받지 않으면 편하게 지내지 못할 것 같았어요.”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10개월 동안 장률 감독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는 윤진서의 가장 큰 고민은 “영화 속 진서가 천사일까 아니면 바보일까” 하는 감독의 질문. 뭐라고 결론냈을까 싶어 물었더니 윤진서는 “영화를 보셨으면 아시겠네요” 한다. 촬영하는 내내 가장 큰 적은 절제의 선을 넘지 않는 것. “많이 울었어요. 가슴이 아픈데 표현을 못하니까. 제 뺨 때리는 장면도 그렇고.” “아이 같은 어른이고 순수한데 또 지식인”이라고 장률 감독의 묘한 매력을 소개한 윤진서는 “<이리>는 죽은 도시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중경>은 살아 있는 도시에서 죽은 사람을 보여주는 영화”라며 두편을 꼭 함께 보라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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