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기억 속 블랙홀 메우기 <바시르와 왈츠를>
문석 2008-11-19

애니메이션 완성도 지수 ★★★★ 흥미로운 다큐멘터리 지수 ★★★★☆ 왈츠와의 관련 지수 ☆

해리성 기억상실이란 뇌의 이상이나 약물중독과 무관하게 개인적 정보를 잊어버리는 증상을 의미한다. 현대의학은 이 증상이 외상적 경험이나 감당할 수 없는 내적 고통을 경험하면서 갑자기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바시르와 왈츠를>의 주인공인 나, 즉 아리 폴만 감독 또한 해리성 기억상실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증상을 자각하는 것은 레바논 전투에 참여했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다. 친구는 폴만이 레바논 전투,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사브라-샤틸라 대학살 현장 주변에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그제야 폴만은 그에 관한 기억이 모두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폴만의 기억 속 서랍을 비우게 한 외상적 경험과 내적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바시르와 왈츠를>은 기억 속 블랙홀을 메우기 위해 폴만이 친구들과 관련자를 만나는 여정을 그리는 영화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 속에서 폴만은 자신이 자리했던 시간과 공간을 파악하게 되고, 잠자고 있던 기억도 되찾기 시작한다. 그는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 3천여명을 학살하는 현장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방조했고 일정 부분 도움까지 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영화의 창의성은 무엇보다 형식적 틀에서 찾을 수 있다. 친구들과 전장의 동료, 종군기자 등 9명의 증언이 주된 내용을 차지하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면 너무 무거웠을 것이고 극영화로 재조합됐다면 지나치게 지루하거나 제작비가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 대신 폴만이 택한 형식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증언들을 바탕으로 극화된 시나리오를 써서 이를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탓에 구상에서부터 완성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성과는 무시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방법론은 나서지 않는 증언자들을 묘사하거나 전투장면을 재현하는 등에서도 유용했지만,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판타지 장면에서 결정적 성과를 발휘했다. 한 병사가 거대한 여성의 사타구니에 안겨 있는 모습이나 폴만이 레바논 공항을 헤매는 장면은 외상을 입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내면에 대한 기이하면서도 섬세한 묘사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대목, 화면이 실사로 전환되는 순간의 충격은 이전까지의 애니메이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 병사가 춤을 추듯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에 깔리는 클래식 선율이나 케이크의 <I Bombed Korea>를 개사한 <I Bombed Beirut>처럼 이미지와 충돌하는 음악도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공헌했다.

폴만은 <바시르와 왈츠를>을 만드는 과정이 “오랜 시간 동안의 치유”라고 말한 바 있다. 가해자의 곁에 있던 그는 기억의 지층에 숨어 있던 상처를 끄집어냄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82년 레바논에서 자행된 학살사건 피해자들의 상처 또한 치유됐을까. 당시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아리엘 샤론 국방장관이 2001년 이스라엘 총리로 등극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팔레스타인인 영혼들의 총구멍은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 그것이 또한 <바시르와 왈츠를>의 정치적 한계일 것이다.

tip/ 이스라엘의 아리 폴만 감독은 미지의 인물이다. 걸프전 당시 이스라엘에 감돌던 긴장감을 코믹하게 담은 다큐멘터리 <Comfortably Numb>(1991)로 이스라엘 아카데미상을 받았던 그는 96년에는 체코의 작가 파벨 코훗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극영화 <세인트 클라라>로 이스라엘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TV시리즈 <사랑을 구성하는 물질>에서 실험적으로 사용한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은 <바시르와 왈츠를>을 위한 밑거름이 됐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