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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도시가 길러낸 영화 시인들

상하이의 심장, 이스탄불의 얼굴, 베를린의 영혼 깊은 곳을 만나보자

<아노니마: 베를린의 한 여인>

모든 위대한 도시는 위대한 영화를 길러낸다. 당신이 사랑하고 잘 아는 도시의 영혼과 그 사람들을 잘 그려낸 영화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새 독일영화 <아노니마: 베를린의 한 여인>도 그렇다. 이 영화는 독일 수도 베를린의 역사 속 한순간을 잡아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적이고 무척 영화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 영화를 대라면 끝이 없다. 내 고향인 런던을 들자면, 50년대 일링 스튜디오 코미디영화인 <패스포트 투 핌리코>(이 영화에서 핌리코 지역은 독립을 선언한다)와 마이클 윈터보텀의 다소 거칠지만 시적인 드라마 <원더랜드>가 있다. 둘 다 런던의 지저분하고 초라하지만 개인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런던에 사는 게 때로 악몽 같을 때도 있지만 런던은 여전히 세계의 위대한 수도 중 하나로 남아 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다른 도시들 역시 자신만의 영화 시인들을 갖고 있다. 중국의 장이바이는 여자 택시운전사와 길 잃은 일본 관광객에 관한 이야기 <상하이의 밤>에서 지치지 않고 뛰는 상하이의 심장의 뛰는 소리를 담아낸다. 장이모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유화호호설>은 베이징의 거칠지만 따뜻한 유머를 잡아낸다. 우미트 우날은 <이스탄불 이야기>에서 이스탄불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주고, 헝가리의 이스트반 자보의 <부다페스트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들은 역사적 순간을 잡아내기도 하고 길들일 수 없는 그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막스 페르버뵉의 <아노니마: 베를린의 한 여인>은 두 가지 경우 모두에 해당된다. 이 영화는, 1950년대 작가 미상으로 출간되어 독일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책은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했던 1945년의 몇달간을 기록한 한 젊은 여자의 일기로 알려져 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쓰여진 비밀 일기인 이 책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문학적이고 성찰적인 어조로, 그 몇달 동안 베를린 사람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2차대전 중 2500만명의 사상자를 비롯해 엄청난 수의 소련군 부상자가 생겼으며, 소련군은 독일에 영원히 남을 복수를 하기 위해 서방 연방보다 앞서 베를린에 입성했다(소련군의 입성은 이후 거의 반 세기 동안 지속된 독일과 베를린의 분단을 낳았다). 히틀러의 자살 뒤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몇주간 소련군은 거리거리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한편으로는 무차별적인 강간과 약탈을 저질렀다. 책은 출간과 동시에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베를린 여자들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정복자들의 성적인 요구를 들어준 것을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쓴 무명의 작가에게 이 책은 유부녀인 자신과 그녀의 아파트를 점령한 유부남 소련 장교와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했다. 둘에게 이것은 편의적인 관계로 시작했으나 두달 남짓한 시간 속에 그 이상의 무엇으로 자라난 것이다.

이 영화는 독일 근대사에서 민감한 시기를 냉정히 들여다보는 최근 몇편의 독일영화 중 하나다. <몰락>은 베를린의 히틀러 벙커의 명령권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같은 시기에 관한 영화고, <더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는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독일 테리리스트 그룹을 다룬 영화다. <베를린의 한 여인>이 뛰어난 베를린영화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의 철저한 사실적 묘사 때문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던 실용적인 사람들의 영혼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번역 이서지연